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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거북 Aug 25. 2020

밍밍하게 끓인 라면의 의미

좋아하는 것을 포기할줄 알아야 어른이건만.

 나는 소위 말하는 아가리어터다. 체중 유지를 위해서 진짜 온갖 노력을 다했다. 흔히 구매할 수 있는 분홍이 초록이도 먹어보고, 대구까지 가서 처방을 받아야 먹을 수 있는 전문약품도 먹어봤다. 뇌에 작용하여 식욕을 강제로 떨어트리는 향정신성 작용제(?) 약품이었다.


 지금 적고보니 되게 소름돋는 약이다. 그 향정신성 의약품의 효능은 끝내줬지만, 약을 끊고 3개월만에 몸무게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빼는데 3달이 걸렸으니, 반년에 걸쳐 몸무게가 오르락 내리락 롤러코스터를 탔을 뿐 다이어트 효과는 없었던 셈이다.


 결혼도 했겠다, 아이돌처럼 늘씬해질 이유가 없으니 지금은 너무 심해지지 않는 정도 선에서 관리하고 있다. 살이 매우 잘찌는 체질이라 아침은 패스하고, 점심한끼만 회사에서 온전히 먹고, 저녁은 간편식으로 절식 후 운동한다.


 운동도 과하게 하지않고 3~40분 정도 홈트레이닝 정도만 한다. 이제는 몸매유지보다는 그냥 습관적으로 하는 느낌이다. 늙어서 관절이 닳았을때 얇아진 관절을 지탱해줄 허벅지 근육을 미리 만들어두려고.


 무려 3일째 절식과 운동에 성공해서 기분좋던 순간 아내가 야근을 끝내고 퇴근했다. 저녁을 먹지 못했다고 라면을 끓여달라고 한다. 계란을 구워줄테니 김이랑 밑반찬 해서 밥을 먹으라고 몇번 얘기해봤으나 라면을 먹어야겠다고 한다.


 아내가 날씬해지길 바라는게 아니라, 건강이 걱정된다. 순 밀가루에 나트륨에... 또 엄청나게 붓는 체질이라 라면먹고 자면 내일 아침에 눈도 제대로 못뜰텐데.


 아내는 나보다 4살이 어리다. 나도 기껏해야 30대 초반이고 아내는 20대 후반이니 완연한 어른이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애매할수도 있는 나이다. "라면이 그렇게 좋으냐? 밥을 평소에 먹고 한번씩 라면을 먹어야지" 라고 얘기해도 아내는 "나는 다른건 몰라도 라면은 포기하지 못한다" 라는 이야기를 한다.


 다른건 몰라도 이건 포기하지 못한다...


 유재석은 무한도전에서 술과 담배를 끊은 이야기를 하며 "진정 좋아하는것을 포기할 수 있을때 어른이 된다" 라고 했다. 런닝맨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잘 뛰어야 하는데, 본업을 위해 좋아하는 술과 담배를 인생에서 잘라낸 것이다. 


 우리 아내는 아직 아이인가 보다. 근데 생각해보면, 나도 20대 후반에 지금처럼 살찌기 전에는 자정에 퇴근해서 집에 가서 라면먹고 자고 그랬다. 새벽 두시까지 술먹고는 만취해서 "아 출출하다" 하며 컵라면에 김밥먹고 자고 그랬다.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 일에 미쳐서 핫식스 5캔씩 먹으면서 새벽야근하고, 술먹으면 파이팅 넘치게. 뭘 해도 내일이 없는 것처럼, 몸사리지 않고 전력을 다하던 시절. 적고보니 너무 나이든 사람 같아서 민망하다. 어찌보면 우리 아내도 지금 그 시기를 살아내고 있는 것이리라.


 결혼하고 서른이 넘어서는 모든일에 전력을 다하진 않는다. 노는것도, 먹는것도, 일하는것도. 나의 몸은 소모품이고 인생은 한번이기에, 바른 생활 습관 만들기 프로젝트를 소소하게 하고 있다.


 위에서 말한 절식과 운동도 그에 따른  작은 실천들이다. 아내가 나이는 어려도 나보다 더 이성적이고 현명하다. 그러니 야근 후 귀가해서 라면을 먹는다고 해서 너무 잔소리 하지말아야겠다. 분명 나보다는 더 일찍 깨달을 것이다.


 지금 나로서는 은근슬쩍 물을 더 넣어서 덜 짜게 끓여주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다. 이건 깨닫지 못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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