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사람, 하정우
최근에 퇴사를 했다. 갈 곳을 구해두지 않고 퇴사를 했다. 예전부터 직장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노가다든 뭘 하든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생각은 했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시기에 회사에서 밀려 나오게 되었다. 남아도는 시간에 책이나 몇권 줍줍하자 싶어서 중고서점에 갔다. 부산 수영구 망미동에 위치한 F1963이라는 곳은 저렴하게 책을 살 수 있고 카페에서 바로 읽을수도 있어 자주 찾아가는 곳이다.
평소에 자주 읽던 경제, 역사 등 머리 아픈 이야기는 지금 시점에서는 정말 피하고 싶어서 가볍게 읽을 에세이를 두 권 샀다. 그렇게 "걷는 사람, 하정우"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퇴사는 했지만 바로 취업은 하고 싶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이제는 어지간하면 어떤 회사에 소속되기 보다는 돈을 조금 덜 벌더라도 자유로운 프리랜서로 일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물론 그 수단이 글이면 더욱 좋고 말이다. 아내와 협의하여 약간의 휴식 기간을 갖기로 했다. 뭘 하지? 게임이나 할까?
백수가 된 첫 날 이 책을 읽고, 걷기가 그렇게 좋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무작정 집 밖으로 나갔다. 우리 집은 수영강 근처에 위치하고 있는데 광안리를 목표로 해서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중간쯤 걷다보면 이런식으로 강과 하늘이 뻥 뚫린 뷰가 나오는데 날씨가 좋은 날에는 정말 기가 막히는 광경이다. 마음 속에 응어리져있던 무언가가 뻥 뚫리는 느낌이다.
광안리를 찍고 집에 돌아오면 대략 3시간 조금 넘게 소요가 된다. 쉬는 것도 그냥 퍼질러져서 쉬는 것은 좋지 않다고 했다. 활동적으로 움직이며 재충전하고 다음 도약을 위한 발판으로 삼는게 중요하다고 했다. 본격적으로 2만보씩 걸은지 이제 겨우 일주일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걷기만한게 없다고 생각한다.
쉬는 동안 새로운 취미라도 개발해볼까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백수가 된 상황이니 비용도 부담스럽고 자신감도 많이 떨어져 있는 상태다 보니 과감히 무언가에 도전하는게 망설여졌다. 이런 상황에서 조용히 걸으며 나 자신과의 대화도 하고 시간을 보내는 건 정말 괜찮은 것 같다.
걷다보면 5분에 한번 꼴로 좋아하는 강아지를 보게 되고 조금 걷다보면 탁 트인 하늘과 강이 나온다. 조금만 더 걸으면 자전거를 세워두고 쉬는 사람들이 보이고, 요트를 타는 에너지 넘치는 젊은 사람들을 본다. 테트라포드에서 낚시를 하며 세월을 낚는 아저씨들도 보고, 길가에 핀 봄꽃들도 본다. 목적지에 다와가서 슬슬 힘들다 싶으면 마린시티의 스카이라인과 수변공원에서 낮술을 하는 한량들을 본다. 많은 광경들을 눈에 담고 돌아오는 것만 해도 제법 힐링이 된다.
언제까지 이렇게 한량으로 살지는 모르겠다. 하루에 세 시간을 오롯이 걷기에 투자하는 것은 분명 보통 일이 아니다. 프리랜서 도전 끝에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재취업을 할지도 모르는 일이고 프리랜서로 어느 정도 수입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해서 이 길로 쭉 갈 수도 있겠지.
가보지 않은 길을 걷는 것을 앞두고 사실은 많이 불안하다. 하지만 한 발자국씩 꾸준히 내딛다보면 결국 목표했던 곳에 나를 데려다주는 이놈의 걷기처럼 언젠가는 원하는 것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