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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음주와 눈물

by 선명이와 지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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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주를 하면 평상시와 다른 행동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평상시에는 말수가 적은 편인데 음주만 하면 말수가 많아지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다. 음주만 하면 용감하거나 과격해지는 사람들이 있고 반대로 우울해하며 소심해지는 사람들이 있다.


왜 이렇게 사람들은 음주를 하면 행동이 변하는 것일까. 사람들이 음주를 할 때 기분은 어떠할까.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이런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대학생이 되기 전에 음주를 안 한 데는 몇 가지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 이유로는 대학생이 된 후부터 음주를 해도 충분하다는 부모님의 조언을 따르고 싶었다. 두 번째 이유로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에 나는 일요일마다 집 근처의 작은 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세 번째 이유로는 입시를 앞둔 청소년들은 음주를 삼가야 하며 소위 '날라리'라고 불리는 학우들이나 음주를 한다고 생각했다.


1988년 H대학교 분교 신입생일 때였다. 따뜻한 봄날에 캠퍼스를 걷다 보면 학생회관, 공학관 등의 벤치나 잔디밭에서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학우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해질 무렵이나 저녁이 되면 신문지를 바닥에 깔고 앉아 소주나 막걸리를 사다 놓고 새우깡, 오징어채 등 마른안주를 먹으면서 앉아 있었다.


봄에 우리 학과에서 신입생환영회와 MT 행사를 진행했다. 대학교 주변에는 지하철이 없었고 다수의 학우들은 통학버스에 의존해서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나는 집이 멀고 통학버스를 타야 하므로 시간이 없어 학과 행사에 참여할 수 없다고 친한 학우들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은 핑계였고 내 성격이 사교적이지 않으며 술자리를 피하고 싶어서 행사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우리 학과 행사가 끝난 후 수개월 지났을 때였다. 사촌동생이 H대학교 본교를 다니고 있었다. 그는 동갑내기이며 동급 학번이라 친구 같은 사이였다. 나는 주말에 종종 본교에 가서 그를 만나곤 했다. 어느 날 그가 나에게 말했다.


"우리 학과 여자 동기들 중에서 술 마시면서 우는 애가 있어"

"술 마시면서 울어? 왜 울까?"


그는 자신이 재학 중인 학과의 학우들 중에서 술을 마시면서 때때로 우는 여학우가 있다고 말했다. 음주를 하면서 운다는 여학우는 학과 동기라고 했다. 그렇다면 대학교 1학년이며 나이가 20살밖에 안될 텐데 여학우에게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단순히 음주를 하면 감성적인 기분이 되어서 그러는 것일까. 아무튼 음주를 하면서 울고 있는 여학우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상상하니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그로부터 일 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다. 학교에는 신입생 후배들이 입학했고 나는 2학년이 되었다. 1학년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음주 자리를 요리조리 피했다. 그래서 내가 술에 강한지 약한지 알 수 없었다. 아직 마셔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신학기가 되었다. 공학관 건물 게시판에는 각종 동아리, 동문회를 홍보하는 전단지들이 붙어 있었다.


[M고등학교 동문회합니다. 일시: 1989년 4월 X일, 회비: 오천원. 단, 신입생은 참가비 무료. 학생회관 앞에서 오후 6시에 모여 이동합니다]


지나가다가 내가 졸업한 M고등학교 동문회를 알리는 전단지가 눈에 띄었다. M고등학교는 서울 동복 쪽에 위치해 있어서 H대학교 분교에서 거리가 멀었다. 따라서 재학 중인 동문들이 별로 없을 것 같았다. 전단지를 본 순간 학교에 재학 중인 M고등학교 동문들을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마음이 끌렸다.


동문회 모임이 있는 날이 되었다. 오후 6시가 되어 학생회관 앞으로 가니 남학우들만 몇 명이 서 있었다. 그들에게 다가갔다. 어떤 학우가 'M고등학교 동문회'가 적힌 종이를 들고 서 있었다. 다가가서 그 학우에게 나도 M고등학교 X회 졸업생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곳에 함께 서 있던 동문들이 나를 보며 반갑게 인사했다. 시간이 지나자 몇 명의 동문들이 더 모였고 우리는 정문 근처의 식당으로 이동했다.


식당에 모여 앉은 학우들은 대부분 동문 선배들이었다. 그들은 저녁 식사를 하는데 소주를 함께 주문했다. 선배들은 식사를 하다가 시간이 조금 지나자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본인만 마시는 것이 아니라 '건배'라고 말하며 함께 있는 학우들에게 술을 권하기 시작했다. 처음 경험하는 술자리였다. 소주를 두세 잔 마셨는데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취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내가 술을 못 마시는 체질이란 걸 느꼈다.


"마시자. 마셔"


앞자리에 앉아 있는 선배가 소주잔을 들더니 건배를 권했다. 학우들은 잔을 들었다.


"동문회의 발전과 이 자리에 모인 모든 분들의 건강을 위하여"

"위하여~!"


내 얼굴은 빨간 홍당무가 되었고 몸은 괴로워지기 시작했다. 필름이 끊기지는 않았으나 세상이 몽롱해 보였다. 술을 마시라고 권유받은 주요 타깃층은 산입생들이었으나 얼굴만 봐서는 오히려 내가 더 마신 듯 보였다. 남학교 동문회라서 남자들만 있었는데 한 선배가 여자를 데려왔다. 그 선배는 자신이 데려 온 여자를 가리키며 여자친구라고 소개했다. 여자가 한 명 있으니 분위기가 더 좋아졌다.


서너 시간쯤 지났을까. 갑자기 내 눈가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이었다. 난처한 것은 앞자리에 선배가 데려 온 여자가 앉아 있었는데 그녀가 나의 모습을 보았다. 한 선배가 나를 보더니 왜 우냐고 말했다. 물론 술자리가 무르익었고 만취한 학우들이 많아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그래서 하루만 지나면 함께 있던 동문 학우들은 나의 이러한 모습을 잘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내가 술에 약한데 선배들의 음주 권유가 강하게 느껴졌고 금주를 권유했던 목사님 말씀이 생각나서 눈물이 났던 것 같다.


대학교 1학년 때 사촌동생이 말했던 내용이 생각났다. 그는 학과 동기 중에 술 마시면서 우는 여학우가 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신가하게 느꼈었다. 그런데 내가 눈물을 흘리다니. 이 일로 사촌동생이 말했던 여학우를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그녀의 사연은 모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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