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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일반전화기와 공중전화

by 선명이와 지덕이

친숙하지 않은 타인에게 말을 걸고 대화를 하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쉬운 일일 수 있지만 나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상대방에게 어떤 말을 해야 어색하지 않을까 상대방이 어떻게 반응할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말을 건다. 그래서 영업사원처럼 쉽게 다가가 자연스러운 대화를 이끌어가는 사람을 보면 부러운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요즘은 정보기기가 발달되어 타인에게 다가가 말을 걸지 않아도 쉽게 대화할 수 있는 방법들이 있다. 스마트폰을 이용하면 타인에게 직접 말하지 않고도 카톡이나 문자로 대화를 할 수 있다. 노트북에 카톡을 설치하면 키보드를 치는 것만으로도 대화를 할 수 있다. 또한 대화가 어색하게 이어지지 않게 상대방과 소통 중에 스마트폰으로 정보를 검색하며 대화거리를 찾을 수 있다.


정보기기가 미약했던 과거에는 일반전화기라는 대화 도구가 있었다. 그때는 핸드폰이 없었으므로 전화기라고 하면 일반전화기를 일컬었다. 전화기는 사용하기에 불편할 때가 있었다. 예를 들어 멀리 떨어져 있는 타인과 통화를 하려면 전화기가 있는 장소로 찾아가야 했다. 즉, 집 안방이나 거실에 전화기가 있다면 그 위치까지 찾아가야 했고 외출했을 때 전화통화를 하고 싶다면 공중전화기가 있는 곳(지하철역, 구멍가게 등)으로 찾아가야 했다. 스마트폰을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어느 곳에서나 대화를 할 수 있는 요즘과는 대비되는 광경이었다.


1980년대 후반, 내가 대학생 때는 핸드폰이 세상에 없었다. 그래서 먼 곳에 있는 타인과 통화하기 위해서 전화기를 이용했다. 집집마다 전화기가 설치되어 있었고 전화기 옆에는 전화번호부가 놓여 있었다. 사람들은 전화번호를 모르면 전화번호부를 손으로 뒤적여 찾아보았다. 전화기 종류로는 유선전화기와 무선전화기가 있었는데 무선전화기는 전화선이 없어서 편리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다른 무선기기의 영향을 받는 간섭현상으로 통화 품질이 나빠질 수 있으며 사용 범위가 제한적일 수 있다는 단점이 있었다.


학교에서 학기가 시작되어 수업을 듣다 보면 급하게 학우들에게 연락해야 할 경우가 있었다. 학교에서 직접 만나서 용건을 말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전화통화를 해야 했다. 우리 집에는 전화기가 있었으나 식구들이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특히 부모님이 집에 계실 때는 전화기를 편하게 사용하지 못했다.


집 전화기를 이용해 전화를 하면 부모님은 종종 누구한테 전화하냐 무슨 목적으로 전화하냐를 물어보았다. 간혹 통화가 길어질 때는 전화기를 왜 이리 오래 붙잡고 있냐라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이럴 때마다 부모님이 내 전화에 간섭하는 것 같아 전화내용에 집중하지 못하곤 했다. 특히 여자에게 전화할 경우에는 더욱 신경 쓰였다.


내가 공대 산업공학과를 다닐 때 우리 학과에는 여학우가 거의 없었다. 학번마다 약간 차이가 나긴 했는데 우리 학번(88학번)은 여학우가 아예 없었다. 그래서 과대표는 여학우가 많은 타학과나 여대의 모학과와 단체미팅을 주선하려고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성사되지 못했다.


대학교 2학년 때였다. 청명한 가을날 몇몇의 학우들과 캠퍼스를 산책하고 있었다. 학우들 중에는 군대를 제대하여 복학한 L선배도 있었다. 그런데 그들과 함께 걷다가 잠시 멈추게 되었다. 반대편에서 서너 명의 타학과 학우들이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데 우리를 보고 아는 척했기 때문이었다. L선배가 타학과 학우들을 아는 모양이었다.


L선배는 그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 일행도 그들과 잠시 대화했다. 그러고 나서 다시 걷고 있는데 L선배가 말했다.


"아까 만난 사람들 중에서 너한테 관심 있어하는 여학생이 있는 것 같아"

"네?"


L선배가 나에게 슬쩍 말했다. 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궁금했다.


"OO과 2학년 윤정이 말이야. 걔가 너에게 관심 있어하는 것 같아"

"윤정이가 누구예요?"

"조금 전 인사했던 체격이 아담한 여자애"

"아. 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아요?"

"눈치가 그래"


윤정이가 누구인가 생각해 보았다. 조금 전 길에서 인사하고 짧게 이야기 나누었던 여학우였다. 길에서 잠깐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인데 나에 대해 얼마나 알겠는가. 그냥 L선배의 느낌을 나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냥 L선배의 농담 섞인 말이라 해도 그녀의 모습이 머릿속에 남았다. 아담한 키에 평범한 외모. 호감형이 아니라 끌리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L선배의 말을 들으니 그녀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로부터 6개월 정도 시간이 흘렀고 병역복무를 위해 군대에 갔다. 나는 운이 좋게도 방위병으로서 예비군동대에 근무하게 되었다. 어느 날 예비군동대에서 퇴근 후 귀가하여 집에 있는데 대학생 때 만났었던 학우들 생각이 났다. 그중에서 대학교 2학년 가을날에 캠퍼스를 산책할 때 길에서 잠깐 이야기 나누었던 여학우가 생각났다.


'작년에 봤던 윤정이는 뭐 하고 있을까?'


그녀의 집 전화번호를 찾아보았다. 책상 서랍 속 메모지에 적혀 있었다. L선배가 그녀가 나에게 관심 있어한다고 말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서인지 그녀가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궁금했다. 그녀의 집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지를 들고 거실로 나왔다.


그런데 집에서 전화하기가 꺼려졌다. 부모님이 내가 다른 사람과 통화하는 것에 간섭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여자한테 전화하려니 더욱 그럴 것 같았다. 그래서 집 밖에서 전화하려고 외출했다. 우리 집에서 백 미터쯤 떨어진 곳에 우체국이 있었다. 우체국 앞 오른쪽 편에는 공중전화박스가 있었다.


공중전화박스 앞에 섰을 때 약간 망설여졌다. 만약 그녀의 부모님이 전화를 받으면 뭐라고 말해야 할까. 남자친구도 아닌데 남자친구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그냥 아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심호흡을 한 번하고 공중전화기를 들고 다이얼을 눌렀다. 수화기에서 발신음이 들렸다.


"뚜~뚜~뚜~뚜~"

"여보세요"

"저기. 저... 윤정이 집이죠? 윤정이 대학교 친구인데요. 윤정이와 통화할 수 있나요?"

"누구? 누구라고 전해줄까?"

"친구요. 대학교 친구"


전화를 받은 사람은 그녀의 엄마 목소리 같았다. 전화를 건 목적 중에 그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떠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이윽고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윤정이니?"

"네. 누구세요?"

"나 선명이라고. 작년 가을에 학생회관 옆 길가에서 L선배님 하고 봤었던..."

"아. 생각나네요. 그때 인사했었던... 그런데 왜 전화했니?"

"응. 좀 생각이 나서... 요즘 어디에 살아?"

"양평에. 우리 집 양평으로 이사 갔어"

"아. 그렇구나"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그도 그럴 것이 길거리에서 잠깐 만나 이야기한 것 외에는 서로 소통한 것이 없었는데 6개월이 지나 생뚱맞게 전화했으니 그럴 법도 하지 않겠는가. 이윽고 내가 말했다.


"언제... 시간 나면 한번 만날 수 있니?"

"싫어. 시간 없어. 미안해"


그리고 예상외의 말이 나에게 들렸다.

"그런데... 너는 무슨 애가 말할 때 그렇게 박력이 없니?"


그녀는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 시간이 흘러서 변했는지 아니면 원래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니는 왜 이렇게 순진했을까. L선배의 말을 그대로 믿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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