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들은 고학년이 되면 졸업 후의 진로를 생각하게 된다. 자신의 전공과 관련된 분야로 취업을 생각하는 학우들이 많다. 대체로 공대생의 경우에는 제조업이나 IT관련 산업에 취업하려고 한다. 그런데 일부의 학우들은 전공에는 관심이 없고 졸업 후에 다른 일을 하고 싶어 한다.
1992년, 대학교 3학년에 복학한 후 알게 된 K선배가 그랬다. 복학했을 때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학우들은 낯설었다. 남학생의 경우 군 복무로 인해 여러 학번의 학우들이 함께 수업을 듣게 되었다. 그래도 수업을 듣다 보면 대화가 잘 통하는 학우들이 한두 명 생긴다. 나에게 있어서 선배는 대화가 잘 통하는 학우 중 한 명이었다. 선배는 종종 내 근처에 앉아서 수업을 들었다. 선배는 말을 잘하는 편이었고 나는 말을 잘 들어주는 편이었다.
3학년 때부터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그러다 보니 시간적인 여유가 생겼다. 저학년 때처럼 수업을 들은 후 통학버스를 타려고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교통체증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기숙사에서 저녁을 먹고 여유롭게 캠퍼스를 한 바퀴 둘러볼 시간이 생겼다.
선배는 나보다 키가 크고 호남형의 인물이었다. 전라도 말씨의 순수한 청년 같았다. 내가 기숙사 생활로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던 것처럼 선배도 학교 앞에서 자취를 했기 때문에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함께 식사를 하거나 대화할 시간이 자주 있었다. 선배와 만나면 종교관, 이성교제, 경제, 정치 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한 번은 선배가 자신은 우리 학과(산업공학과)에서 아웃사이더라고 말했다. 학우들 사이에서 나서지 않고 맡은 것 없이 조용히 지낸다는 것이었다. 학과 행사에도 관심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후 나도 그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동질감을 느꼈다.
"상록수 소설 읽어 봤니?"
어느 날 선배가 상록수(常綠樹)라는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상록수는 심훈(1901.10.23~1936.9.16)이 일제강점기 시절 최용신의 농촌계몽운동을 소재로 쓴 소설이다. 상록수에 나오는 여주인공인 채영신의 실제 모델은 최용신이다.
최용신(1909.8.12~1935.1.23)은 엘리트 신여성으로서 1930년대 초중반에 경기도 수원군 반월면 샘골(현 경기도 안산시 본오동)에서 샘골학술강습소를 설립해 농민들에게 성서, 수예, 한글, 재봉 등 여러 과목을 가르쳤다. 최용신의 농촌계몽운동은 농민들의 의식을 바꾸는데 이바지했다. 상록수는 심훈이 최용신 사후(死後)에 발표한 소설이다.
"최용신 같은 분이 세상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 안타까워. 일제치하에서 농민들에게 헌신하며 가르치는 삶을 살았던 분인데"
선배는 만날 때 최용신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했다. 만나면 전공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하는 다른 학우들과 달리 선배는 최용신 사랑에 빠진 듯했다. 마치 팬클럽 회원처럼 말이다. 선배는 최용신에 대한 자료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최용신의 생애'라는 책을 쓴 서울대 명예교수 R교수님을 찾아가서 최용신에 대해 물어보고 자료를 얻기 위해 협조를 구했다고 말했다.
선배는 농민을 위해 헌신한 최용신의 생애와 정신이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지고 후대에 계승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이러한 일에 뜻을 함께 할 사람을 찾았다. 하지만 주변에 관심 있는 사람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선배는 혼자서라도 최용신을 기념하기 위해 무언가 하고 싶어 했다. 특히 최용신이 독립유공자로 추서 되기를 바랐다.
"너 혹시 최용신에 관심 있니? 내가 보기에 너는 관심 없는 것 같은데"
"미안하지만 저는 전공분야에만 관심 있어요. 형을 도와드리지 못할 것 같아요"
선배는 내가 최용신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혹시 몰라서 한 번 물어보는 것 같았다. 나는 일 년만 지나면 4학년이 될 것이고 진로를 고민해야 할 시기가 된다. 그래서 선배의 생각은 매우 훌륭하지만 나로서는 학업 이외에 관심을 갖고 싶지 않았다.
대학교를 졸업한 후 4년 만에 선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선배는 여전했다. 선배는 최용신 기념사업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초판 발행된 '최용신의 생애'라는 책을 우편으로 보내주고 싶다고 말했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선배가 운영하는 블로그를 발견했다. 블로그에는 상록수 소설과 최용신, 서울대 R교수님에 대한 내용들이 많이 있었다. 내용을 읽다가 선배가 최용신의 독립유공자 추서 청원에 기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최용신을 1995년에 독립유공자로 추서하여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사시사철 늘 푸르른 나무 상록수. 상록수처럼 늘 푸르고 깨어있는 상록수 정신은 무엇일까. 상록수의 여주인공 채영신의 실제 모델 최용신의 인생을 통해 본 상록수 정신은 무엇일까. 선배는 블로그에 아래와 같이 적어 놓았다.
상록수 정신
일제하 처절했던 민족 수난기에
나라의 광복 위해 모든 것 버리고
농촌 계몽의 선구로 불사조 되어
이 고장 이 마을에 생명을 바쳤네
영원히 역사에 푸르른 얼이여
꽃다운 처녀 싱그러운 상록수여
민중의 가슴속에 뿌리 깊이 잡아
지금도 쉬지 않고 사랑으로 자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