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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C학점 받고 재수강한 이유

by 선명이와 지덕이

부모덕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부모로부터 재능을 물려받거나 금전적 지원, 후원, 보상 등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나는 대학 다닐 때 부모덕을 보았다. 아버지가 재직 중인 대학교에 입학해서 좋은 점이 많았다. 직계장학이라고 하여 등록금이 면제되었고 여러 교수님들도 알게 되었다. 기숙사를 입소할 때도 유리했다.


그런데 한 가지 안 좋은 점이 있었다. 아버지가 근무하던 S학과 대부분의 교수님들이 나를 알게 된 것이었다. 이것은 상당히 좋은 일이지만 간혹 부담이 되기도 했다. 교수님들이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점은 좋았지만 S학과 과목에 대해 성적을 잘 받아야 한다는 점은 부담이 되었다. 왜냐하면 내가 S학과 과목에 대해 좋지 못한 성적을 받으면 아버지가 체면이 안 서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S학과 교수 중에서 나이가 가징 많은 최고참 교수였다. 그리고 S학과 과목은 공대에서 필수로 이수해야 하는 과목이었다.


S학과 교수님이 나를 알고 있어서 생긴 일이 있었다. 1993년 3월 초, 대학교 4학년 때의 일이었다. O과목의 첫 수업시간이었다. O과목은 우리 학과(산업공학)가 아닌 S학과 교수님이 가르치는 과목이었다. J교수님이 강의실에 들어왔다. 그는 30대 후반의 젊은 교수였다.


"야. 너 4학년 아냐?"


그는 강의실에서 갑자기 큰 목소리로 나에게 물어보았다. 그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약간 놀랐다.


"네. 맞아요"

"네가 여기 왜 있어?"

"저기.. 재수강이에요"


순간 강의실에서 학우들이 폭소했다. 모두 나를 쳐다보았다. 갑작스러운 그의 질문과 재수강이라는 내 대답이 학우들을 웃겼던 모양이었다. 학우들 중에는 기숙사에서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대부분은 초면이었다.


그는 내가 4학년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와 같은 학과에 근무하는 동료 교수로서 아버지 보다 훨씬 젊은 후배교수였다. 내가 4학년이 되어서 3학년 때 받았던 F학점을 없애지 않으면 내 평점이 많이 하락할 것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재수강했다.


3학년 때 성적확인 기간에 O과목 성적을 과사무실에 게시했었다. 사실 그때는 내 성적이 F학점이 아니었다. 원래는 C학점인 70점대 초반 점수였다. 하교 후 집에서 부모님에게 이 사실을 말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내 성적이 C로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화를 냈고 담당교수인 B교수님에게 F학점으로 처리해 달라고 전화로 요청했다. 아버지가 화를 낸 것은 내 미래를 걱정해서이기도 하지만 사실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아버지 본인의 체면 때문이었다. 후배 교수들에게 내 성적이 안 좋다는 것이 알려지면 선배 교수인 아버지의 체면이 구겨지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자존심이 세고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자기와 관련된 일에는 민감하게 반응했다. 내가 아버지에게 O과목에 대한 성적을 C로 받았다는 사실을 말하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1992년 6월, 대학교 3학년 때였다. O과목 기말시험을 쳤는데 망쳤다. 과연 B이상의 성적이 나올 수 있을까 불안했다. 성적확인기간에 성적 확인을 위해 과사무실에 갔다. 과사무실에는 O과목에 대한 성적표가 한쪽 벽 게시판에 붙어 있었다. 성적표에는 학우들의 점수가 학과와 학번순으로 적혀 있었다.


과사무실에는 성적을 확인하기 위해 방문한 3학년 학우들이 나 외에도 여러 명 있었다. 그들도 본인들의 성적을 확인하고 있었다. 성적표에 적힌 학과와 학번 리스트 중에서 내 학번을 찾아보았다. 학번 옆의 성적을 확인했다. 성적이 70점대 초반 점수로 적혀 있었다. 실망스러웠다.


'제기랄. 좋지 않은 성적인걸'


70점대 초반 점수라면 O과목 성적이 C로 표기될 것이었다. 그러면 재수강이 불가능한 성적이다. 학칙에는 D+이하의 성적만 재수강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옆에 같이 성적확인하던 학우들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성적이 이상한데. 이렇게 점수가 안 좋을 리가 없는데"


한 학우가 말했다. 다른 학우들도 성적이 이상하다고 말했다. 학우들은 담당교수인 B교수님에게 이의제기 해봐야 하지 않냐고 말했다. B교수님이 점수를 한 명씩 뒤로 밀려 적거나 잘못 채점한 게 아닐까 의심스러워했다. 그래서 집에 가서 부모님에게 이 사실을 말했다. 내 말을 잠잠히 듣고 있던 아버지가 갑자기 화를 내기 시작했다.


"다른 과목은 몰라도 우리 학과 과목의 성적을 이렇게 안 좋게 받으면 어떡하니?"


아버지는 본인의 체면이 어떻게 되냐고 말했다. 나는 다른 학우들도 그러는데 성적표의 성적이 이상하다고 말했다. 성적표에 성적을 한 명씩 밀려 적었거나 아니면 잘못 채점했을 수 있으니 확인해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담당교수인 B교수님이 누구인지 확인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B교수님이 정교수가 아닌 젊은 강사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B교수님과 전화 통화를 했다.


"B교수. 우리 집 애가 O과목 성적이 70점대를 받았다는데 확인 좀 해주쇼. 채점을 정확히 해서 그 점수가 나왔는지 말이오"


아버지는 성적표에 성적을 한 명씩 밀려서 기재했을 수도 있으니 꼼꼼히 다시 검토해 보라고 요청했다. 하루가 지났다. B교수님한테서 전화가 왔다.


B교수님은 성적표에 학우들 성적을 한 명씩 밀려 적은 실수를 인정했다. 하지만 내 성적은 다시 채점해 봐도 C라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B를 줄 수 있냐고 물었다. B교수님은 내 성적을 아무리 봐도 B이상으로 줄 수 없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화가 나서 내년에 재수강하면 되니 내 성적을 F로 수정해 달라고 말했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4학년 때 O과목을 재수강하게 된 것이었다. 이런 일이 한 번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버지가 재직 중인 학교에 다닌 것은 나에게 커다란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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