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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물리학과 L교수님

by 선명이와 지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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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을 돌아볼 때 생각나는 한 명의 교수님이 있다. 작고하셨지만 살아계실 때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셨던 물리학과의 L교수님이다. 교수님은 나보다 우리 아버지와 특별한 친분을 가졌던 분이셨다. 그런데 교수님이 나의 어떤 모습을 좋게 봐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가끔씩 아버지와 전화통화를 할 때면 내 안부를 물어보곤 했다. 그래서인지 대학시절을 생각하면 그분에 대해 생각날 때가 있다.


내가 교수님을 알게 된 것은 1989년 3월의 봄날이었다. 그날따라 통학하기 위해 우리 집 자가용을 이용했다. 보통 1교시부터 수업이 있는 경우 학교까지 통학버스를 이용했지만 수업이 오전 늦게나 오후에 있는 경우에는 종종 아버지와 함께 자가용을 타고 통학했다. OO학과 교수였던 아버지는 수업이 늦게 시작하는 경우에 자가용을 운전하여 학교에 갔다. H대학교 분교까지 거리가 2시간 이상 걸려서인지 아버지는 운전할 때면 카세트테이프로 트로트를 듣거나 MBC FM 라디오 '여성시대'를 듣곤 했다.


학교 주차장에 도착하여 자가용에서 아버지와 함께 내릴 때였다. 앞쪽에서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50대 중년 남자가 아버지에게 다가와 아는 척을 했다. 아버지와 알고 지낸 지 오래된 듯했다. 아버지는 그분과 대화를 몇 마디 하다가 그분에게 나를 소개해 주었다.


"무슨 과 다녀? 나이는 어떻게 돼?"

"산업공학과 다녀요. 21살이구요"


교수님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약간 작은 키에 탄탄해 보이는 체형. 약간은 빠른 말투. 내가 본 교수님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교수님은 이과대 교수였고 나는 공대 학생이었으므로 교내에서 마주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과대와 공대의 거리가 가까운 편이라서 다니다가 가끔 마주칠 때가 있었다.


하루는 학교에서 걸어가다가 교수님을 만났다. 교수님은 아버지에게 말하지 말고 자기 연구실에 한번 방문해 달라고 말했다. 그래서 교수님 연구실에 방문했다. 교수님은 시끄러운 나라가 안정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운동권 학생들이 데모하는 것을 자제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도 했고 내 미래에 대해서 물어보기도 했다.


"20대는 꿈을 세우는 시기야"


교수님은 20대 나이에는 뜻을 세우고 미래를 준비하는 시기라고 말했다. 교수님은 낭만이 있고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2학년 2학기 때 교수님이 가르치는 물리학 수업을 들었다. 전공과목도 아닌데 일부러 수강했다. 수업을 들으면서 물리학은 공부할수록 어렵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때때로 수업시간에 교수님이 말하는 사담(私談)은 재밌었다. 예를 들면 연애편지를 여자친구(현재의 사모님)에게 수십 번 보내 결혼에 골인했다는 러브스토리와 같은 내용 말이다. 어느 날 교수님은 특별히 나에게 호의적으로 대해주는 것에 대한 이유로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에게 관심 있는 이유가 뭔지 알아? 네 아버지 때문이야"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아버지와의 친밀한 관계 때문에 나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교수님은 아버지보다 5살 연하로서 평소에 아버지를 형님처럼 잘 따르는 사이였다. 전공과 근무하는 학과가 서로 다른데도 어떻게 마음이 잘 통했을까. 아버지는 보수적이고 무뚝뚝한데 말이다. 아마도 교수님이 말을 잘 거는 사교적인 분이라서 아버지와 통하는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했다. 경기도 이천시에 있는 직장에서의 생활은 바빴다. 간혹 아버지는 퇴근 후에 귀가해서 엄마에게 교수님과 대화한 내용을 말할 때가 있었다. 어떤 날은 교수님이 내가 결혼할 때 주례를 서고 싶다고 말한 적도 있다고 했다. 세월이 흘러 2002년 30대 중반의 나이가 되었다. 주말에 집에 있는데 아버지가 교수님에 대한 안부를 말했다.


"L교수가 암에 걸려 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전화가 왔어. 그런데 네가 결혼 안 했으면 여자 소개해 주겠다고 하더라. 전화해 봐"


아버지는 교수님이 안타깝게도 큰 병에 걸려 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전화 연락해 보라고 말했다. 그래서 회사 퇴근 후 기숙사에서 전화를 걸었다.


"올해 나이가 몇이냐?"

"34살인데요"

"결혼했어?"

"아니요"

"이놈아. 너네 아버지 나이가 많은데 빨리 결혼해야지. 여기 병원에 결혼 안 한 간호사들 몇 명 있는데 한 명 소개해 줄까?"

"아... 네..."

"얼마 줄래?"

"네?"

"세상에 공짜가 어딨어?"


교수님은 병원에 입원해 있어서 건강이 안 좋을 텐데 내 걱정을 해주고 있었다. 대학교를 졸업한 후 연락 한 번 드린 적 없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교수님은 몸이 안 좋았지만 고령의 우리 아버지가 내 결혼에 대해 걱정을 하는 것을 보고 도움을 주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이것이 교수님과의 마지막 대화가 될 줄은 몰랐다.


교수님은 일 년이 경과한 후 건강악화로 세상과 이별하셨다. 아버지는 교수님이 작고하신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교수님 유가족한테서 연락을 못 받은 모양이었다. 교수님은 우리 학과의 교수님들이나 아버지가 근무하는 학과의 동료 교수님들과 달리 내게 관심을 많이 가져 주셨던 분이었다. 지금도 대학생 때를 생각하면 교수님 생각이 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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