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생활은 어쩔 수 없는 '눈치보기'의 연속이다
"아니, 걔는 왜 한국 여자를 만난대? 한국 여자들 엄청 사납다던데!"
설날에 대만인 남자친구(팅이)의 친척들을 만나기 전에 들었던 말이었다. 팅이의 작은 삼촌이 내가 한국인이라는 소식을 듣자마자 한국 여자들은 기가 너무 세다느니, 몸매가 다 건실하다느니와 같은 말들을 남자친구 부모님께 했다고 한다.
팅이의 작은 삼촌이 대체 어디서 그런 선입견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듣자 하니 한국 드라마는 엄청 챙겨본다고). 자극적인 혐한 뉴스인지, 아니면 기가 센 주인공들만 나오는 드라마만을 본 것인지, 솔직히 말하면 만났을 때 직접 물어보고 싶기까지 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어이가 없으면서도 동시에 나도 모르게 고민이 좀 됐다. 내가 먼저 친척들에게 살갑게 다가가고 말을 걸어야 하나? 내가 좀 노력해서 팅이 친척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겨야 하나? 만약 마음만 먹으면 사실 여우처럼 구는 건 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행동이 20여 명의 대만 사람들의 '한국인'에 대한 인식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부담감도 있었다. 그 자리의 대부분 사람들이 한국이라는 나라는 알아도 한국인은 잘 만난 적이 없었고 단순히 매체나 인터넷을 통해서만 어렴풋한 인상을 갖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내가 만들어내는 실수 하나가 그 사람들에게는 '한국인은 어떻더라'하는 선입견을 만들기 쉬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꽤나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결론은 'no'였다. 내 있는 모습 그대로가 별로라고 느낀다면 그냥 그 사람들이 나랑 안 맞는 사람들일 뿐, 나에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라는 사람 자체도 막상 만나보면 꽤나 괜찮은 사람이라고, 나 스스로 꽤나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간 친척들과의 자리에서는 생각보다 별게 없었다. '쟤가 바로 그 한국인 여자구나'라는 시선은 비록 느껴졌지만 난 최대한 내 평소의 모습을 유지하려 애썼다. 만약 누군가 내게 말을 걸어오면 담백하고 간단하게 답을 하고, 나도 궁금한 게 생기면 먼저 다가가서 물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괜히 오버하거나 그러지 않고 딱 적당한 수준을 유지했다.
4시간 정도가 지난 후, 친척들과의 첫 만남이 끝이 났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팅이의 어머니가 말하길, 작은 삼촌이 나를 만나고 나서 한국여자에 대해 본인이 꽤나 오해를 했던 것 같다고 먼저 말했다고 한다. 막상 만나보니 괜찮은 애여서 놀랐다고, 그런 말을 해서 미안하다고.
하지만 막상 그런 말을 들었음에도 별 느낌이 들지 않았다. 속이 시원하다느니, 이겼다는 기분이 든다느니, 그런 건 전혀 없이 그냥 '그렇구나'라는 생각만 들었다. 만약 내가 가식적인 모습으로 그 사람들에게 살갑게 대하기 위해 애썼더라면, 어쩌면 앞에서 말한 것처럼 승리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것 없이 그냥 나는 내 모습 그대로 그 사람들을 대했을 뿐이었다.
예전에 어떤 책에서 이런 내용을 본 적이 있다. 이방인이란, 낯선 환경과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끝없이 눈치를 봐야 하는 존재라고. 맞다. 외국인으로서 살아가는 입장으로서 어쩔 수 없이 계속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게 해외생활의 현실이다. 하지만 만약 본인이 정말 괜찮은 사람이라면 난 굳이 너무 애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연극은 끝나기 마련이고, 내가 정말 괜찮은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들도 그런 나를 알아봐 줄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