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고집 성공-<백마김씨네 도곡 본점>
백마김씨네.
나의 동네에서 우리 가족이 줄곧 가는 고깃집이다.
아이들이 '소'를 노래 부르는 날이라면 행여나 다른 식당으로 이탈하지 않고, 이 곳으로 향한다. 사실 처음에는 여타 식당들을 검색하기도 하고 근처 이웃의 추천으로 다른 식당을 가기도 했었지만, 결국 여기가 최선임을 재확인 하는 시간들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소고기가 당기는 날에는 고민하지 않고 바로 직행할 수 있는 식당이다.
하지만, 소고기를 외식으로 한다는 것은,
그것도 강남 지역의 한정식에 버금가는 찬이 겸비된 고급진 곳에서 소를 사 먹는다는 것은,
꽤나 큰 마음을 먹어야 가능하다는 것이 서글픈 팩트(fact)이다.
특히나 현재 외벌이가 된 우리 가정에 '외식비'라는 항목은 아무래도 신경이 쓰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이제는 특별한 날에나 가는, 혹은 마음 먹고 가야하는 식당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오늘은 점심에 그것도 내가, 나 혼자 먹으러 왔다는 것이다!
숯불에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구워지는 생갈비의 처음 한 점.
그것의 맛은 나도 모르게 나오는 행복한 웃음으로 대신하겠다. 육즙을 가득 품고 숯불 향이 솔솔 내 코 점막을 자극하며 입으로 냅다 들어오는 첫 한 점. 입에서 살살 녹는다는 표현으로 대신하기엔 한참이나 아쉽다. (맛의 표현이 너무 한정적이라는 게 슬프다)
환상의 첫 한 점을 그리 살포시 먹고 나서, 다음 살점부터는 굵은 소금도 찍어 먹게 되고, 양념 간장과 함께, 혹은 양파절임이나 파절이와 함께 계속해서 입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오늘따라 고기가 더 맛있다. 여사님이 구워 주는 고기이기에 더 맛있었던건지도.
그것도 혼자 대낮 점심 피크시간에 들어와 아줌마 홀로 고기를 구워 우걱우걱 먹고 있으니, 다른 테이블에서도, 구워주시는 분도 흘끔 흘끔 나를 쳐다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개의치 않았다. 아니 개의치 않으려 했다고 표현하는 게 맞겠다.(물론 식당 입장에서는 빌런이었을지도..)
남의 시선 따윈 개나 줘버린 듯, 전혀 거리낌 없이 맛에만 집중할 수가 있었다.
분명 오늘은 내가 '나'를 데리고 가서 잘 먹여 주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현재 대한민국은 코로나 이후 한 번 걸리면 당췌 떨어지지 않는 '감기'라는 아이로 몸살을 앓고 있다. 나역시 '원 오브 뎀(one of them)'이 되어 버렸다.
며칠간 너무 아팠다.
사실 아직도 아프다. 하지만, 지난 주 수액이라도 맞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던 상태는 아니라 감사하다.
근 3년간 이비인후과 근처도 안갔던 터라, 며칠 전에 갔던 병원이 생소하기까지 하다.
몇 년간 안 보던 사이, 의사 선생님도 좀 늙으신 것 같았다.
이번 감기는 특히나 코에서 목으로 바통터치 하며 넘어가기만 하고는 수 일이 지나도 기관만 바뀔 뿐 차도 없이 고생만 하는 환자들이 많다며 병원 간호사가 넌지시 얘기해 주었다. 나는 이제 시작인데, 그럼 며칠은 더 고생해야한단 말인가.
한참을 이불 속에서 끙끙 앓으면서, 갑자기 내 스스로에게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사람이 아파서 마음이 약해지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경향이 있기 마련. 그동안 내가 너무 내 자신을 챙기지 않고 무리했던 건 인정해야 했다.(사실 개인적인 몇 가지 이벤트로 인해 나보다는 가족을 먼저 챙기기에 급급했다.)
가정의 한정적 자원 앞에서 나는 늘 최 후선으로 밀려났고, 내가 가진 '돈'이라는 것의 유무와 관계없이 항상 나에게 인색 했으며, 내마음을 살피기보다 다른 가족들 혹은 타인에게만 정신이 팔려 그들 위주로 모든 일들이 돌아가지 않았는가.
맛있는 음식을 목전에 두고도 아이들과 남편 먼저, 내가 평소 갖고 싶었던 '머스트해브템' 앞에서도 갖가지 변명으로 내 마음을 무시해 왔으며, 항상 내가 원하는 것들을 주장하지 못한 채 타인의 눈치를 살피며 그들을 따라가지 않았느냔 말이다.
그래서, 내가 노했나보다.
많이 속상했나 보다.
불과 얼마 전, 정말 '나'만을 위한 시간을 보내고, '나'만을 위한 삶을 살겠다 하며 회사를 뛰쳐 나왔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회사 내에선 늘 조직에 복종해야 했으며, 나의 의견보다는 조직과 다수의 의견에 따라 모든 것을 처리하고 계획해야 했기때문에 '나'라는 존재가 없었다. 그래서 굳게 다짐했었다. 퇴사와 함께 나를 최우선의 자리로 끌어다 놓겠다고..
그런데, 퇴직 이후에도 끝끝내 바뀐 건 별로 없었다. 단지 조금의 시간 여유만 생겼을 뿐, 그 조차도 나를 위해 쓰는 건 거의 없으니, 나란 인간은 원래 부터가 그리 생겨 먹은 사람이었던걸까.
정말이지 많이 아프긴 했다.
물론 저질 체력을 타고 난 탓에 어렸을 적부터 잔병 치레가 많긴 했다만, 코로나 이후 오히려 재택 근무와 퇴사로 인해 외부 활동을 자제하고 난 이후론 병원에 단 한 번도 들른 적이 없는 이례적인 일이 발생하긴 했었다. 그래서인지 오랜만에 찾아온 증세에 대한 고통이 더 크게 느껴진 걸지도 모른다. 이와 함께 그간 살아온 내 삶의 태도에 대해 생각하게 해 준 계기가 되어 주기도 했다.
독한 약을 한 주먹 먹고 헤롱헤롱한 가운데 이불 속에서 생각난,
Episode #1.
예전에 회사 다닐 때 있었던 일이다.
본사에서 저녁 간식으로 치킨 몇 마리를 배달시켜 준 적이 있었다. 도착한 뜨끈뜨끈한 치킨 박스를 여는 순간, 한 여직원이 닭다리를 잽싸게 낚아 채 갔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여직원 한 명이 시크하게 건넨 말.
-꼭 애 엄마들이 저러더라. 집에서 못먹으니까 나와서 저렇게 닭다리만 보면 환장한다니까.
당시 미혼이었고 까칠했던 그 여직원은 늘 제 할말은 다해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였다. 갑자기 이 순간 간 그 장면이 왜 생각나는 걸까.
맞다. 늘상 닭다리는 아이들의 몫이었다. 나도 집에서 닭다리를 안먹어본지 꽤나 된 듯 하다.(물론 요즘 치킨 메뉴는 다양해서 부위 별로만 시킬 수도 있긴 하다) 생각해보면, 나도 어렸을 적엔 닭다리만 먹었던 것 같다. 그리고 아직도 퍽퍽 가슴살은 치킨에서 맛이 없다. 그런데도 아이들 먼저 부드럽고 맛있는 부위를 챙겨주고 나는 늘 뒷전이 되었다.
Episode #2.
지금은 모두 여대생이 된 나의 큰집 조카들.
그 아이들이 청소년기에 한창 머리를 길게 길렀을 당시, 샴푸 값이 많이도 들어간다며 푸념 했던 나의 시댁 형님.
그녀는 친환경으로 만들어 질이 좋은 고가의 샴푸를 어디선가 구입하게 되었는데, 아이들이 머리 카락이 길어 금새 쓸 것 같아 화장실 한켠에 몰래 숨켜 두고 자신만 쓴다고 했었다.
당시엔, 같은 엄마의 입장으로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 이기적인 모습의 그녀를 내심 흉보며 색안경을 끼고 욕했었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자신을 아이들보다 먼저 생각하는 그 마음이 그리 욕먹을 짓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조카들이 연약한 피부의 갓난 아이도 아니고, 일반 샴푸를 쓰는 것이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의 위험한 일도 아니지 않은가.
질좋은 샴푸를 아이들보다 자신을 위해 먼저 쓰겠다는 것인데,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그 마음이 그리 이기적이고 나에게 욕먹을 짓이었을까.
결국 나라는 사람은 그런 사람이었다.
나보다 가족,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위해야만 편해지는 그렇게 생겨 먹은 인간.
그래서 난 늘 내가 최후선으로 밀려났던 것이었고, 그래서 나의 마음을 제대로 돌보아 주지 않았던 것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나의 엄마가 그러했다. 늘 가족을 먼저 생각하셨고, 당신보단 가족을 우선시 하셨던 분이셨다.
나 역시 그런 모습을 보며 자라왔던 것이었고.
나의 딸아이 역시 이런 내 모습을 보고 자라 그리 살아갈까 갑자기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그래서 난 조금씩 지금부터라도 내 자신을 먼저 챙기기로 약속했다. 물론, 기나긴 세월의 습관을 한 번에 고칠 수는 없으리라. 하지만, 아주 작은 것 부터라도 조금씩 내가 원하는 그 마음을 잘 살펴 보고 들어주리라고.
그 비싼 고깃집에 가서도 아이들 먼저 먹이느라 늘 후선이었을 '이전의 나'를 보듬어 주기 위해 오늘은 과감히 나 홀로 점심에 가서 풍족히 나의 배를 채워 주었다. 한 달에 한 번이라도, 그게 힘들다면 분기에 한 번이라도 '나만을 위한 날'을 만들고 계획해서 온전히 내 마음을 들어주기로 나이 반백이 되어서야 시도해 본다.
감기 바이러스의 침투로 내 몸안에 모든 세포들이 격렬히 싸우고 있는가보다.
그래서 속이 허기졌던 건지도.. 고기가 급 땡겼는 건지도 모르겠다.
비싼 고기를 흡입해 주어서인지, 나를 다독여 준 탓에 내 마음이 풀린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저녁엔 '감기'라는 녀석이 발을 많이 빼고 나간 흔적이 보인다.
나의 면역 세포들이 '슈퍼 파워'를 발산할 수 있도록 소고기는 힘을 많이 보태 주었고, 나는 이번 일로 내 자신을 더 보듬어 주는 시간을 갖게 되었던 것 같다.
가끔씩 나만을 위한 사치를 부려 보는 것.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