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부삼천지교

최선의 선택

by 낭만주의 사업가

나의 아버지는 배움에 있어 한이 있으셨댜.

본인이 많이 배우지 못해서

선택을 하는것에 한계가 있고, 그로인해 주변도 모두 한계를 안고 살아간다고 생각하셨다.

어릴적부터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학력을 묻는 질문엔 그 언제도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은적이 없었고,

아마 제대로 된 대답을 들었어도 난 믿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결혼 전에는 노원에 사셨다고 했다.

아버지는 우리가 자라는 동안에는 그곳에서 남양주로 옮겨온 것에 있어

학교문제는 정말 후회스럽다고 말씀하셨다.

그렇지만 남양주 중에서도 좋은 학교가 있는 동네에 보따리를 펼쳤다며 늘 자랑스러워하셨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겠지만,

그당시 교육낙후지역이던 남양주에서도 그나마 좋은고등학교, 그 옆 중학교, 그 학교로 배정받는 초등학교가 있는 마을에 보따리를 펴서 우리가 좋은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며 뿌듯해하셨었다.


나는 어린시절부터 잔병치례가 잦고 심약했고, 공부에 매진하는 분위기의 집안이 아니었음에도 성적이 꽤 괜찮은편이었다.

어릴적부터 영특했던 오빠에게 모든 관심이 가있던 부모님 조차도 기대치 않은 선방에 놀랐을 정도로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부터 성적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물론 막 엄청 잘해서 동네 수재소리를 듣는 그런건 아니었다.

그냥 기대했던 것 보다 잘했다. 이 수준이란 거다.

내가 고등학교를 가던 시절에 남양주는 비평준화 지역이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비평준화 지역이고 워낙 남양주 자체가 넓은데도 불구하고, 구리와 남양주는 하나의 교육청으로 되어있어 고등학교 입시는 두 지역이 구분없이 진행되었다.

남양주보다는 훨씬 더 서울에 가까운 구리시 학생들이

경제적으로 지원이 좋았고, 학원가도 훨씬 잘 되어있었으며, 교육환경도 좋은 가정이 많이 포진되어 있었다.

비평준화 지역의 고등학교 입시는

원하는 학교에 지원하고 지원자들 중에서 연합고사와 내신성적의 합산 점수로 등수가 매겨지고 정원까지만 선발되는 과정이었다. 단 하나의 학교에만 지원할 수 있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남양주 학생들은 시험을 잘 못봐서 지원한 학교에서 떨어지면 저 멀리

청평, 양평, 하남 등지의 학교로 다녀야 했다.

대학입시보다도 고등학교 입시가 더 치열했다.


나와 오빠는 모두 지역에서 가장 좋다는 그 학교에 진학했다.

지역이 좀 그렇다보니 1학년부터 우열반이 있었는데, 모두 우반에 붙어 부모님의 가슴이 벅찼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었다.


원진레이온은 내가 3~4학년때 문을 닫았다. 부모님은 회사의 파업과 상관없이 계속 집에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가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이 안나지만 어머니가 동네어귀에 만물상을 차리고 개업행사를 했던 기억이 4학년때로 기억이 난다. 아무튼 그 후에 원진레이온은 정말로 많은좋은분들의 도움을 받아 산업재해를 인정받았고, 어디서 그 큰돈이 생겼는지는 모르겠으나 (원진레이온 부지와 공장매각 등등으로 생긴 돈이라 여겨진다) 원진장학재단을 세우게 되었다. 지금은 남양주 장학재단.. 비슷한 이름으로 변경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원래 그 이름은 원진장학재단이었다.

장학재단이 생기고 얼마 안되어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고, 처음 입학할때부터 나는 입학성적이 좋아 학교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고 입학하였다. 입학할때에는 꽤 많은 인원에게 장학금을 주어 받을 수 있었지만 2~3학년이 되면서는 학교에서 주는 단순 성적우수 장학금을 받을수는 없었다. 그만큼 잘하지는 못했고, 그 장학금이 얼마나 큰 것인지도 나는 알지 못했다. 그냥.. 어렸다.

2학년이 되어서 교내장학금을 받지 못한 학생들중에 몇명이 선발되어 원진장학금이란 것을 받게 되었다. 그렇게 2,3학년 등록금도 장학금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오빠때는 이런 과정이 없었는데 2년 터울인 나 때에는 선발과정이 있었던 것을 보아 내가 고등학교에 막 진학할때쯤 장학재단이 설립이 되었는가보다.

그당시는 아버지의 직업병 판정이 있기 전이었으므로, 장학재단에서 주는 장학금이 매우 달고 맛있었다.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지만 잘 흘러가 장학재단까지 세워진 아버지의 옛 회사는 자랑스럽지는 못했지만 그 후의 행보가 퍽 그럴싸해서 든든하기도 했었다.

아버지는 신혼초 팍팍했던 살림에 세가 더 저렴한 지역으로 이동하지 않고, 그 동네에서 버틴것이 신의한수였다 말씀하셨다. 내 기억속의 첫 집은 속셈학원, 피아노 학원에 둘러쌓여있는 2층집이었는데 그덕분에 아이들이 수학도 잘하고 음악적 소양도 높아졌음을 믿고 계셨다. 그 후에는 중학교를 좋은 학교로 배정받을 수 있는 초등학교 근처로 집을 매매하여 이사하였고, 결국 원하던 고등학교에까지 진학시켰으니 말이다. (우리 남매는 불행히도 그 중학교를 배정받지는 못했다. 근처에 다른 새학교가 생겨 두 학교중에 무작위 배정을 받았는데 우린 둘 다 그 새학교로 배정되었다.)

비록 자식이 둘다 공대로 진학하는 바람에 자식이 모두 소위말하는 화이트칼라의 길을 걷길 바랐던 아버지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배움에 늘 아쉬움이 있던 아버지의 한은 어느정도 해소가 되었다. 아버지 기준에 많이 배우고 넉넉했던 분들의 서울로 유학보내는 교육을 시키지는 못하셨지만, 서울 근처에 자리잡아 서울로 모두 대학을 보내고 박사까지 만들어낸 아버지의 업적은 아버지 스스로에게 매우 자랑스러웠다.


어른이 되고나서 아이를 키워보니

아이의 학교에 맞춰서 이사하고 자리잡는것이 그렇게 녹록치 않음을 알게되었다.

많은 분들이 학군지로 이동하여 아이들을 키우고 계신다.

아마도 우리아버지와 같은 희망을 품고 있거나 그 이상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함일것이다.

물론 나도 나의 아이들을 그렇게 키우고 싶었다. 욕심껏 학원에 보내고 빠른 성과로 멀리까지 길게 이어지길 바라며 학군지로 이사했을 수도 있다. 멕시코에서 한국으로 귀임하면서 우리가 어느지역으로 들어갈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많았다. 나는 나의 아이가 나의 어릴적보다 훨씬 더 나약하고 불안하다 생각하여 그에 맞는 장소를 선택하게 되었다.

나는 그당시 나의 아이에대한 믿음이 부족했던 것 같다.

나도 아버지와 같이 굳은 믿음으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의 학군지로 아이를 밀어넣었더라면 조금 더 아이가 공부를 잘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내아이는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고, 더 잘할 수 있는 잠재력이 보이는데 심약한 어미의 노파심으로 더 잘할 수 있는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결국는 내가 겁이나서 더 욕심껏 잘하고 싶어하는 아이에게 좋은 학습환경을 주지 못한것도 있다는 거다. 어마어마하게 잘난 맹모삼천지교의 삶은 되지 못했지만 뜻을 가지고 이동하셨던 나의 아버지의 뚝심을 다시한번 생각하게 되었던 부분이다.


어제.아버지가 없는 첫 어버이날이었다.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의 수목장에 다녀왔다.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도 모르고 카네이션을 달아줄 수 없으니

카네이션 대신 카네이션 유리장식을 준비했다.

아버지 나무에 햇빛이 잘 들길 바라는 마음으로 유리장식을 걸어두었다.

어머니는 그 앞에서 아버지의 색소폰 연주 동영상을 한참이나 틀어두셨다.

당신 좋아하던 곡 우리는 아직까지도 잘 듣고 있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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