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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엘 Oct 15. 2019

그때와 지금

순례길을 걸으며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던 두 번의 기억이 있다.


2017년 6월 경.


첫 번째 위기는 출발한 지 일주일도 안 되어서 팜플로나(Pamplona)에서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로 가는 길에서 일어났다. 아침부터 도시 팜플로나를 두 발로 걸어가며 벗어나는 기분은 꽤 짜릿했는데 꼭 걸어서 세계 속으로 스페인 북부 편을 찍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몇 시간 동안 정통으로 내리쬐는 햇볕을 온몸으로 받으니 기력이 쇠하여 걸을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쩌다 한 번 씩 보이는 수돗가에서 물을 뒤집어썼는데도 언제 그랬냐는 듯 옷은 금방 말랐고 온 몸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무거운 짐은 미리 다음 숙소로 보내 놓았기 때문에 중간에 아무 숙소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이 악물고 억지로 걸었는데 서러워서 괜히 분통이 터졌다. 멀리서 내가 오기를 기다리던 분이 나중에 말하길, (당시 나는 검은색 옷을 입고 있었는데) 저 멀리 작은 검은 점이 분명히 보이기는 보이는데 움직이는 것 같지를 않아서 오고 있는 건지 아닌지 헷갈렸다고 한다. 도착해서 그분께서 일단 맥주부터 마시자고 나를 근처 아무 바에 데려가 주셨는데 그때 땀과 눈물이 범벅된 얼굴로 꿀떡꿀떡 맥주를 흡입하는 날 보고 다른 순례자들이 즐거워했다. 6시간이면 가는 거리를 11시간이 걸려서야 도착했다. 길에서 해가 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해가 중천에 있을 때 도착해서 다행이었다.    


두 번째 위기는 아마 중후반쯤이었던 것 같다. 어느 마을에서 어느 마을을 가는 길인지도 기억이 안 난다. 다만 주저앉아서 멍 때렸던 그 장면 장면은 기억이 난다. 그날도 새벽 일찍 출발했는데 이상하게 몸이 잘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딱히 피곤하고 힘들었던 것은 아닌데 누군가 내 몸을 조종하는 느낌이랄까. 발이 잘 안 떼지고 딱히 앞으로 가겠다는 의욕이 생기지도 않았다. 바에 붙어 있는 택시 전화번호를 보고 택시를 불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 직원에게 이 택시를 불러 달라고 도움을 요청했는데 네가 직접 하라며 거절을 당했다. 다시 터덜터덜 걸었다. 첫 번째 위기와는 다른 느낌이었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했다. 일단 모든 짐이 내 등에 있어서 아무 숙소에 들어가 쉴 수도 있고 사실 몸이 그렇게 고달프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머리를 비우고 그냥 천천히 걸었다. 목표로 했던 마을에 반드시 도착해야겠다는 마음도 없었다. 그냥 걸었다. 걷다 만난 바에서 또 퍼질러 앉아 30분을 보냈다. 걷고 바에서 퍼질러 앉고를 반복했다. 이렇게 하다 보니 목표로 했던 마을에 도착을 하긴 했다. 아마 5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를 8시간을 걸려서 갔던 것 같다.   



얼마 전 지인이 순례길을 가고 싶어 나에게 조언을 구하러 왔다. 이런저런 말씀과 내가 줄 수 있는 남은 물품을 건네 드렸지만 그분의 마음엔 걱정과 겁이 가득 찬 상태여서 내가 건네는 것들이 별로 소용이 없어 보였다. 그 후 순례길행은 포기를 했다는 얘기를 들었고 대수롭지 않은 에피소드로 넘겼다.


그리고 며칠 전, 그분으로부터 순례길을 걸으러 스페인에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한국 출국도 아니고 이미 스페인에 도착을 했단다. 항공권을 끊기까지, 배낭과 신발을 사면서, 비행기를 타면서, 스페인에 도착해서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까. 그 겁 많던 사람이.


직접 경험을 해보니 생각보다 괜찮다고 한다. 발목이 아파서 포기하겠다는 말 대신 다음 마을까지 버스를 어떻게 타면 되냐고 묻는다. 신발과 양말에 대해 조언을 건네고나니 당시 내가 겪었던 두 번의 위기가 생각났다. 이 분은 어떤 위기를 겪을까, 어떤 경험들을 하게 될까, 그 많던 겁과 걱정은 과연 사라지게 될까, 아니면 또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될까.


온전히 그 분 본인만의 시간을 위해 나는 최소한으로만 개입해야 하는데 입이 근질거린다.


내가 순례길을 걷고 있을 때도 다들 이런 기분이었을까?


나의 100일의 여정을 함께 했던 조개껍질을 드렸었다. 내가 무탈하게 다녔던 그 기운이 전해졌으면 좋겠다. 그렇게 드시고 싶은 김치찌개와 삼겹살을 먹으며 순례길 썰을 풀 수 있는 그 날을 기다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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