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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엘 Nov 10. 2019

스물다섯스물셋 (2/3)

사키와의 2박 3일 - 둘째 날

2019년 10월 20일 일요일


여행에서 사키는 철두철미한 계획파다. 몇 시에 어디에서 무엇을 먹을지, 어디에서 어디까지 무슨 교통수단으로 이동할지 정해놓는다. 그래서 그가 한국에 오면 아주 편하다. 루트를 짜줄 일도 없거니와 나도 모르는 현지 식당을 꿰뚫고 있어서 오히려 새로운 정보를 배우게 된다.


계획대로 오전 9시에 근처 이삭토스트에서 아침식사로 토스트를 먹었다. 곧 떡볶이를 먹을 예정이기 때문에 거창한 아침식사는 필요 없었다. 메뉴판에 일어도 함께 표기되어 있어서 주문할 때 도와줄 필요가 없었다. 길거리에서 토스트를 금방 해치우고 지하철을 타고 합정의 '또 보겠지 떡볶이'로 향했다.


떡볶이집 오픈 시간까지 한 시간 가량이 남아서 합정 일대를 걸으며 산책을 했다. 오전에 합정에 갈 일이 없었기 때문에 정말 새롭게 느껴졌다. 밤새 취객으로 가득했을 펍들은 문을 활짝 열고 청소를 하고 있었다. 길거리는 아주 깨끗했고 공기도 맑았다. 클럽 롤링홀 앞에서 사키에게 내 추억의 장소라고 소개했다. 롤링홀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그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사키는 그곳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빤히 쳐다보며 내려가 보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합정 부근에는 일본식으로 지은 술집이 많다. 사키는 매우 신기해하며 연신 사진을 찍어댔다. 저런 건물이 일본에도 많냐고 물었더니 아주아주 옛날식으로 지은 것 같다며 자기도 보기 힘든 스타일의 건물이라고 했다.


드디어 또 보겠지 떡볶이에서 떡볶이를 주문했다. 사키가 원한대로 깻잎은 빼 달라고 했다. 그는 전부터 그렇게 이 집 떡볶이가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는데 막상 매워서 제대로 먹지를 못했다. 거의 울면서 버티던 그는 먹다가 포기를 했고 내가 다 해치웠다.  


바로 마을버스를 타고 망원시장으로 향했다. 정말 오랜만에 왔다. 여행은 내가 하고 있구나. 사키는 지난 여행 때 망원시장에서 못 먹은 시베리아 호떡을 꼭 먹어야겠다고 했다. 호떡이면 호떡이지 시베리아 호떡은 또 뭐냐고 물었더니 자기도 모르겠다고 아무튼 그런 게 있다고 했다. 더 궁금했다. 그럼 나도 먹어야지.


망원시장은 내가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재래시장이 아니었다. 간판과 매대가 매우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으며 호객행위도 없고 바가지 씌우는 상인들도 없었다. 일요일이라 장을 보러 나온 주민들과 관광객들로 시장바닥이 매우 북적였다. 외국인 관광객도 꽤 많이 보였다. 사키가 어느 집 닭강정이 유명하대서 닭강정으로 우선 입가심을 했다. 흔한 맛인데 왜 유명한지 모르겠는 맛이었다. 우리 동네에도 맛있는 닭강정집 있는데. 그리고 대망의 시베리아 호떡집이 보였다. 주문을 하고 이름이 왜 시베리아 호떡인지 묻고 싶었는데 직원이 그렇게 친절해 보이지 않아서 용기가 안 나서 못 물어봤다. 역시 흔하게 먹을 수 있는 호떡이었다. 다만 가격 대비 두껍고 제법 커서 가성비는 괜찮은 듯했다.


이삭토스트, 닭강정, 시베리아 호떡


카페인이 너무 당겨서 망원시장 안에 있는 이삭토스트에 들어갔다. 두 번째 이삭토스트 방문이다. 사키는 키위주스를 시켰다. 그는 못 먹는 것이 많다. 카페인, 초콜릿은 입에도 못 대고 술도 전혀 못하며 케이크는 유일하게 치즈케이크만 먹는다. 희한하다.


또한 사키는 화장품에 아주 관심이 많은데 쇼핑해야 할 목록에 화장품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특히 눈주름이 걱정이라며 아이크림을 무엇을 사야 할지 고민 중이었다. 내가 화장품에 대해 잘 모르니 그는 나에게 이삭토스트에서 일하고 계시는 직원에게 대신 여쭤봐 달라고 했고 그것을 시작으로 두 명의 직원과 대화를 하게 되었다.


- 이 친구가 일본에서 왔는데 한국 화장품 중에 아이크림 좀 추천할만한 게 뭐가 있는지 물어봐 달래요.

- 아이크림? SK2가 좋은 거 아니에요?

- 글쎄, 일본 화장품이 더 좋지 않나?

- 얘는 한국 화장품이 좋대요. 뭘 추천해 주면 좋을까요?

- 난 설화수 밖에 모르는데...


잠시 후

 

- 근데 요즘 일본인 관광객 안 받는 가게가 있다던데 정말 있어요?

- 글쎄요, 저도 얘기만 들었는데.. 있긴 있지 않을까요?

- 우리가 관광객까지 거부할 필요는 없잖아요.  

- 그러니까, 나는 여기에 이렇게 관광객이 북적대니까 다채롭고 좋은데, 일반 시민까지 미워하지는 말자고요.

-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사키가 무슨 얘기를 나눴냐고 물었다. 말 그대로 전했다. 음료수를 다 마시고 가게를 나서려는 찰나, 사키가 갑자기 직원에게 한 마디 건넸다.  


- 나는 아베를 싫어해요.

- ?? 

- ?? 

- ??


한국어로 간단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사키는 종종 뜬금없는 말을 하는데 워너원 영상에서 봤는지 가끔씩 "즐기고 있습니까?"라고 대뜸 묻곤 해서 나를 빵 터지게 만든다. 사키의 뜬금없는 아베 언급에 모두가 큰 소리로 웃었다. 빵 터진 직원들은 사키에게 방문해줘서 고맙다고 악수를 건넸고 위아더월드 모드가 되어 인사를 하며 헤어졌다.


사실 사키가 한 말에 크게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안다. 그는 아베 정부 정책에는 반대할지는 모르겠지만 'NO JAPAN'이라고 쓰인 길거리 포스터를 보고는 '크레이지'라고 중얼거렸고, 유니클로 불매운동을 다루는 한국 뉴스를 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역사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한 대다수의 일본인 중에 한 명인 그가 가질 당연한 태도라고 생각되었다.


- 너 문재인을 좋아하니?

- 지지하지는 않아. 근데 전 대통령보다는 훨씬 낫다고 봐. 너도 우리나라 전 대통령이 어떻게 물러났는지 알잖아. 지금 정부는 예전 정부에서 벌인 일들 수습하느라 개고생하고 있지.

- 문재인은 우리나라를 되게 싫어하는 것 같아.  

- 우리 언론을 너무 믿지 말자. 어차피 과거사가 해결되지 않는 한 이런 대립은 계속될 거야.   

- 난 안 싸웠으면 좋겠어.

- 나도 그래.


다음 코스 서울역 롯데마트로 향했다. 롯데마트 서울역점은 다양한 식료품이 진열돼있고 택스 리펀을 손쉽게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쇼핑을 목적으로 한 외국인 관광객에게는 아주 핫한 곳이다. 역시 중국, 일본에서 온 관광객으로 발 디딜 팀이 없었고 시식 담당 직원들은 간단한 외국어를 구사하며 고객을 맞이했다. 컵라면을 싹쓸이하고 싶은 사키는 나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구했지만 나는 라면을 즐기지 않기 때문에 답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같이 둘러보다가 사키가 붉어진 얼굴로 우리 각자 쇼핑하면 안 되겠냐고 양해를 구했다. 아이고, 불편했구나. 내가 눈치가 없었다야. 진작 말하지. 뭘 또 얼굴까지 빨개지면서 힘들게 말을 하고 그래.


전혀 살 게 없었던 나는 최근에 다친 무릎에 통증이 밀려오고 있어서 어디든 앉고 싶었다. 의자를 찾으러 가는 길에 느닷없이 전동 휠체어에 발목까지 부딪히는 바람에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다. 각종 김, 컵라면, 과자를 카트에 한 무더기 쌓아서 쇼핑을 마친 그와 함께 숙소로 복귀하니 해가 저물었다.


고맙게도 사키는 저녁 메뉴까지 깔끔하게 정해놓았다. 저녁 식사를 한 이후에는 동대문에서 밤 쇼핑을 하겠다고 한다. 체력도 좋지. 만신창이가 된 나는 저녁만 같이 먹고 숙소에 들어와 쉬기로 했다.


혼자서는 먹기 어려운 음식을 이번 여행에서 같이 먹기로 했다. 그래서 그가 고른 메뉴는 보쌈. 널리고 널린 게 보쌈집이기 때문에 이번에는 나름 현지인으로써 검색을 했다. 근처 종로에 보쌈 골목이 있어서 그곳에 평이 좋은 곳으로 향했다. 식당은 허름했지만 음식은 깔끔하고 맛있었다. 피곤한 몸을 보쌈과 맥주로 달래니 잠이 솔솔 왔다. 여행은 네가 하는데 왜 내가 이렇게 피곤하니. 저녁을 먹고 체력도 좋은 사키는 동대문으로 향했고 나는 숙소로 가려는 찰나 내일모레가 사키 생일인 게 떠올랐다.


몰랐으면 몰랐지 알았는데 그냥 넘어가기 아쉬워서 작은 조각 케이크라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또 얜 치즈케이크가 아니면 안 먹어요. 까다로운 것. 늦은 시간이라 문을 연 가게가 많지 않았다. 다리는 더 아파오고 얼른 눕고 싶었다. 제일 만만한 프랜차이즈에 가보니 마침 조각 치즈케이크가 있었다! 비록 불은 못 붙이지만 기분이라도 내려고 숫자 25 모양의 초도 샀다. 이것이 사키를 울게 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도 못했다.


숙소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일단 누웠다. 사키에게 도착하기 20분 전쯤에 연락 달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잠을 잤다. 눈을 떠 보니 이미 10분 전에 사키로부터 메시지가 와 있었다. 밤 10시 30분이다. 이 시간까지 쇼핑을 하다니. 부랴부랴 조각 케이크를 펼쳐 초를 꽂고 사키가 오기를 기다렸다.


출입문이 스르륵 열렸고 다짜고짜 조각 케이크를 들이대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 우리 캐나다에 있을 때 난 23살이고 넌 25살이었잖아. 우리 같이 있으면 그때로 돌아간 것 같잖아. 넌 아직도 25살 같아. 계속 그렇게 25살 하자.


사키가 엉엉 울었다. 내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준비했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겠지만 너무 생각 없이 한 말이라 그의 반응에 내가 더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초간단 이벤트를 끝내고 난 다시 침대에 누웠고 그는 테이블에 앉아 케이크를 먹으며 동대문에서 있었던 일을 재잘재잘 얘기했다. 그러다 갑자기 너무 고맙다고 또 울었다. 울면서 케이크를 먹으며 동대문 얘기 하기를 몇 번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케이크를 다 먹었다. 진짜로 맛있어서 먹은 건지 생각이 없는데 고마워서 꾸역꾸역 먹었는지 알 길이 없었지만 그 와중에 까다로운 사키는 장식용 초콜릿은 나에게 건넸다.


영원히 넌 스물다섯이야 베베. 드립을 치고 싶었는데 이 노래를 모를 것 같아서 하질 못했다. 이 드립을 못해서 아직도 찜찜하다.


사실 사키는 일본의 디르앙그레이라는 밴드의 오래된 팬이다. 그들의 공연을 보기 위해 삿포로에 비행기를 타고 다녀왔단다. 이런저런 음악 이야기를 하다가 그는 원오크락(ONE OK ROCK)이라는 일본 밴드의 노래를 틀어주며 나의 반응을 기대했다. 미국 밴드 같았다. 내가 알고 있는 일본 밴드의 느낌이 아니었다.


- 일본팀 같지 않은데? 그냥 미국 밴드 같은데?

- 어, 얘네 영어도 완벽하게 구사해. 아마 영국 유학파일걸?

- 유학도 다녀오고... 좋겠다.


사키는 오늘 쇼핑한 것들을 펼쳐놓고 캐리어에 어떻게 꾸릴지 마음이 분주한 것 같았다. 내일 일본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불에 파묻혀 얼굴만 내놓고 사키를 구경하다가 기절했다.


25살의 사키. 당시 내가 아끼는 티셔츠를 그에게 선물했다. 같은 록매니아여서 음악 이야기를 하며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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