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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 살

2023.06.08 토로하다 제 11장

by 토로

피 같은 휴가 중 망할 비소식을 듣게 되었다.


‘우산도 없는데..’


그렇게 터벅터벅 캠퍼스를 걷는데 한 커플이 각자 우산을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모습을 보고 든 못된 생각은 ‘어차피 하나만 쓸 거면서’라는 질투였다. 글을 쓰는 지금 생각해 보면 되게 유치하지만, 이런 유치함 덕분에 예전에 우산을 가지고 스피치 활동과 설치미술을 기획하던 때가 생각났다. 스피치는 그럭저럭 했지만 설치미술 기획은 제작 여건의 문제로 실행까지 가지는 못했다. 그래도 우산이라는 사물을 볼 때마다 나름 생각해 오던 것이라 브런치에 적어본다.


우산의 기본 용도는 비를 막아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속성을 가지고 발표했던 발표 내용은 아래와 같다.

그때 스피치 활동의 주제는 ‘사물을 선정해서 파는 것‘이었다.

저는 우산을 팔겠습니다. 정확히는 우산을 쓸 때 기울어지는 기울기를 팔고 싶습니다. 우산은 조금씩 비가 올 때도 , 폭우처럼 수없이 비가 많이 올 때도, 비를 피할 수 있는 공간을 우리에게 선물합니다. 요즘 같이 비가 가끔 올 시기에 우산은 필수입니다. 누군가와 우산을 함께 써본 경험이 한 번쯤은 있을 것입니다. 친구가 되었던, 애인이 되었던, 부모님이 되었던 그때의 기억을 잠깐 떠올려보시길 바랍니다. 혼자 쓰는 우산은 똑바로 서있지만 함께 쓰는 우산은 옆으로 기울어져있습니다. 본인이 우산을 들 때면 어깨가 조금 젖더라도 우산을 그 사람 쪽으로 자연스럽게 더 기울여주기 마련입니다. 저는 우산과 함께 이 기울어지는 마음을 팔겠습니다. 비를 피하는 용도의 우산도 좋지만 함께 하는 사람을 위한 따스한 기울기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우산을 쓰며 기울어진 마음을 선물해 보시길 바랍니다. 비 속 우산이 기울어진 기울기는 세상 어떠한 기울기보다 아름다울 것입니다. 우산과 함께 따스한 기울기를 가져가세요. 감사합니다.

나는 우산을 보며 기울기에 대해 생각했다. 결국 우산의 기울기는 사랑하는 사람을 항해 기울게 되니까.


지금 다시 발표 대본을 보니까 나름 F인 것 같기도 해서 뿌듯하다.


그리고 이런 기울기에 대한 생각의 연장선이 반영된 것이 설치미술에 담길 뻔했다.


서로가 당연한 사이가 되고, 서로에게 기대는 것이 당연해지는 상황이 온다면, 비와 같이 서로의 사이에 위협이 되는 외부 요소를 막는 우산이 결국, 본인에게 오는 힘듦과 같은 요인을 흘려 상대에게 기울게 만드는 상황을 묘사하고 싶었다.


맨 위에는 장우산과 같은 퀄리티 좋고 상처 없는 우산을 위로, 점점 우산의 모양이 부식되고 퀄리티가 떨어져 결국 우산 살만 남아있게. 단 맨 밑의 우산 살만 남은 우산은 거꾸로. 매달아 더 이상 서로의 힘듦을 받아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기획이 전시로 이어지면 좋았을 텐데, 지금 생각해도 조금 아쉽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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