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15 토로하다 제 18장
2025.06.10
오랜만에 글을 쓰는 지금, 먹먹해지는 이 느낌은 뭘까.
무엇에 두근거리는 건지 쿵쿵거리는 건지, 숨 막힐 정도로 쌓여 작은 구멍을 찾아 간신히 쌕쌕거리는 천명음인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토로하지 못한 것들이 가득 쌓여있음의 압박감일까, 쌓인 것들이 꿈틀거려서일까, 그것들을 드디어 토로할 생각에 설레는 마음일까.
아무래도 그건 글을 쓰며 알아가야겠다. 난 그런 사람이니까. 잘 모르겠을 때는 일단 흰 바탕에 검은 잉크 몇 방울 떨어뜨리면 된다. 번져갈수록 잉크는 진해지니까.
6월 9일. 21살 때 처음 가봤던 해방촌의 작은 책방에 발걸음이 닿았다.
원래 사려던 책이 품절되어 아쉬운 마음에 들척거리기만 했던 한 책의 표지가 넘어갔다. 그리고 그곳에 머물렀다. 책방에서 나올 때는 빈손으로 나올 수 없었다.
'오랜만에 글을 쓸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스침에 딱 하나 남은 책의 포장지가 벗겨졌다. 그 책의 표지가 넘어간 순간부터 이 글도 시작되었다.
책 제목은 '기억의 정거장을 지난다'.
사실 책을 사고 나서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책을 열어보게 된 건 앞표지를 넘긴 게 아니라 뒤표지를 넘겼기 때문이다.
첫과 끝을 관철하는 단 하나의 요소는 지하철. 20명의 작가가 함께 지하철이라는 단 하나의 펜을 가지고 마지막 마침표를 찍었다.
아직 책을 다 읽지 못했지만 슬며시 20명 사이를 비집고 싶다. 그 많은 작가가 함께 했는데 1명 정도 늘어난다고 크게 달라질 건 없지 않은가.
이번 역은 건대, 건대입구역입니다.
질문도, 보기도 하나다. 가장 기억에 남고 특별한 지하철 역이라고 한다면 건대입구역 밖에 더 있겠나.
괜히 식상한 것 같아서 다른 지하철 역을 떠올려보곤 했지만 글을 위해 글을 쓸 수는 없으니까.
서울에 막 올라와 짐을 풀고 한강 구경 좀 해본다며 고개를 위로, 시선을 분주히 움직이고 노선표를 보며 실컷 헤맸던. 그런 20살의 어리숙한 발걸음이 처음 건대입구역에 닿았다. 모든 새로운 시작은 건대입구역과 함께 했다.
살면서 처음 하는 아르바이트 출근길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도, 친구들과 추억을 쌓는 것도. 꼭 지하철을 타지 않더라도 여전히 나의 처음은 건대입구역 주변에 남아있다.
혼자 보다는 함께했고, 웃음과 설렘이 끊이지 않아 가끔 나오는 하품이 낯설었다.
그런 2년간의 대학생활이 잠깐 쉬어갔다. "앞차와의 간격 조정으로 서행하겠습니다"나 뭐라나. 분명 천천히 간다고 했는데 시간이 멈춰버렸다. 곧, '앞차가 전역을 출발하지 않아 앞차와의 간격 조정을 위해 잠시 정차한 후에 떠난다'는 안내방송이 21개월간 반복되었다.
그리웠다. 누구나 그런 과정을 겼었을 테지만 서도 쉽게 적응이 되지 않았다. 간격 조정이라길래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자기 갈 길 가야 할 텐데 왜 멈춘 건지, 또 다른 앞차가 앞에 있던 건지 항상 궁금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꼭 뒷 차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신발끈이 풀린 친구를 기다리듯.
승객 하나 없고 기관사 하나 있는 텅 비었을지도. 그 기관사는 머리 짧은 누군가를 기다렸겠지.
뭘 기다리길래, 어떤 조정이 필요하길래, 크게 레일을 벗어난 것도 아닌데 그리 출발하고 있지 않았던 건지. 2년 뒤의 나는 나에게 뭘 기대했는지. 이유를 알려주지 않으니 이유가 스며들었기를. 지금의 내가 무언가를 기대했다면 그때의 나도 기대정도는 할 수 있겠지.
205.06.11
퇴근하고 쪽잠을 잔 뒤에 다시 책상에 앉았다.
분명 회사에 다녀왔지만 어제와 또렷이 이어지는 기분이다.
25년의 건대입구역은 사뭇 다르다.
강의실을 한 번도 들어가지 않았으니 다를 만도 하다. 수업을 듣는 곳이 아닌 일하러 오는 곳이다.
해가 바뀔 때, 학교에서 일할 기회가 생겨 곧바로 1월에 휴학을 냈다.
원래 계획이 한순간에 뒤집혔기에 올해는 고시 준비 전 보험을 드는 과정이라 타일렀지만 사실은 자신이 없었던 것 같다. 꼭 햇살이 너무 뜨거운데 선크림 바르기 귀찮아서 그냥 나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살이 타는 게 꼭 빛이 바래가는 것만 같은데 그렇다고 무언가 덧댈 자신이 없다.
간신히 열차가 다시 출발하게 된 지 1주일 채 지나지 않아 서울에 올라와 일하며 나름 바쁘게 지냈는데 개찰구에 교통카드를 찍을 때 나는 소리의 반복임은
2025.06.12
나를 더 가라앉게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부모님 때문인지, 주변에 교직 생활을 하시는 분이 많아서인지 특별한 뜻이 없다면 대학교 교직원을 미래 직업으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을 줄곧 한다.
딱 3가지. 일단 대학교가 일터라는 점과 안정적이라는 점. 내가 생각하는 교직원의 장점이다. 일터가 대학이라는 점에서 꽤나 젊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잠깐 학교에서 일하며 느낀 것은 역시 받아들이기 나름이라는 것.
그리고 마지막 1가지. 내가 떠올린 장점은 아니고, 가장 존경하는 교직원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이다. 본인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가 가족이라면, 퇴근 후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은 곳이 가정이라면 이 직업은 최고의 직업이 될 수 있다고 하셨다. 이 말을 듣자마자 우리 가족이 생각났다. 매일 아침, 저녁 식사를 항상 함께 했다. 그때는 그 시간이 얼마나 감사한지, 소중한지 몰랐다. 그냥 그 시간에 대한 고민조차 하지 못했을 때니까. 그 소중함을 알지 못하게 할 정도로 당연하게끔 해준 것도, 시간이 지나 소중했음을 깨닫게 해 준 것도 부모님의 가장 중요한 가치가 가족이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 아닐까. 언제든 사랑을 말해도 부족할 부모님과 항상 틈을 열어주시는 교직원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2025.06.15
항상 거쳐간다. 그냥 거쳐간다. 안에서 잠깐 머물고 지나간다.
한 달 전부터 직장을 옮겼다. 요새 가장 많이 드는 생각은 유행도 사는 것도 돌고 도는 걸까 싶다. 열일곱에 꾸던 꿈의 실마리가 살며시 얽혔다. 나의 대학 전공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건 맞지만 막상 대학에 진학해서는 등한시하여 넘겼던 분야다. 자꾸만 스스로를 의심하고 툭, 튀어온 곳 없게 사포질을 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새로운 환경의 나를 시험해보고 싶었다. 일하게 된 지금도 여전하지만, 나는 나를 알아가고 시험해 보는 중이다. 항상 내려치기 바빴던 스스로가 조금은 아까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는 요즘이다.
도착지를 위해 경유하는 곳. 지금의 건대입구역은 그렇다. 앞으로도 잠깐의 머묾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할 정도로 큰 변화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중이다.
전혀 낯선 세계의 풍경과 그 속에 뛰어든 나, 매일 타던 지하철조차 생경하다.
성인이 되고 4-5년째 건대입구역에 가장 많은 발걸음이 닿았다. 앞으로 2-3년 뒤에도 - - -
가끔 지하의 이야기가 절실하게 궁금하다.
내가 나를 한 번만 만날 수 있다면 지하에서 출구로 계단을 오르고 있는 나를 만났으면 좋겠다.
지하철에서 내려 모르는 사람들 사이, 땅에 가시라도 난 듯 급히 발을 떼고 있는 나를 꼭 붙잡고.
오늘의 나는 어떤 사람인지, 누구를 만나러 가는지, 나를 기다려주는 사람은 있는지.
정말 간단한 이야기더라도 지하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지하에 이야기는 금방 잊어버린다. 뱉지 않으면 금방 사라진다.
어제의 이야기를 오늘 온전히 담아두고 싶다. 설령 내일 잊어버리더라도.
지상의 이야기는 궁금하지 않냐고?
신기하게도 해가 잘 드는 곳에서는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개미들이 줄 지어 이동하는 것처럼 나오던 이야기가 지상에서는 뚝 끊긴다. 해가 들어 더 잘 보일 텐데. 조금은 더 따스할 텐데. 길을 잃는다.
그래도 강남을 지날 때 보이는 한강만 보면 창문에 찰싹 들러붙는다. 말을 하지는 않는다. 항상 큰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보는 건 20살이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지상에서의 침묵이 되려 지하의 말로 이어진다. 가끔은 침묵이 환기가 되나 보다.
뭐, 내가 두더지 같은 사람일 수도 있고.
매일 같은 시간대, 같은 색의 열차를 타려고 지하로 걸음을 옮긴다.
매일 다른 이야기를 지하로 옮긴다. 매일 다른 발자국이 지하에 남는다.
나는 오늘 지하에서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