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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발바닥 Aug 26. 2022

7. 안락사를 번복할 수 있는 유일한 경우의 수

14살 닥스훈트의 투병일지

몸을 가눌 수 없어 유모차에 누워 생활했던 탁구의 모습.


‘무지개 다리를 건널 수 있는 창문이 열렸다’     


외국에선 반려견의 안락사를 고려해야 할 시점이 왔을 때 이런 표현을 쓴다고 한다. 어떠한 치료로도 반려견의 고통을 덜어주지 못했을 때, 가장 적극적으로 고통을 끝내게 해 줄 수 있는 방법이 안락사다. 일부 수의사들은 안락사가 “적극적 형태의 치료”라고도 말한다.

      

보호자에겐 ‘창문을 열 수 있는’ 결정권이 주어진다. 반려견은 사람처럼 언어로 의사 표현을 할 수 없기에, 적절한 시기가 오면 수의사의 의학적 소견을 바탕으로 최종 결정을 내려야 한다. 하지만 평소에 안락사에 대한 확고한 철학이 있어도 정작 ‘적기’가 오면 스스로의 결정에 회의를 품게 된다.      


‘안락사의 적기’를 판단하는 절대적 기준은 없다. 하지만 반려견의 삶의 질을 수치화해 평가하는 방법이 있다. 통증·배고픔·수분 공급·위생 상태·행복감·활동성·기력 7가지 항목을 각각 0부터 10까지 점수로 매긴다. 총점 70점에서 합산 점수가 30점 미만이면 안락사를 고려해야 할 시기다.     


보다 직관적인 방법도 있다. 매일 달력에 반려견의 삶의 질을 표시해보는 것이다. 7가지 항목을 기준으로 반려견이 양질의 하루를 보냈다면 ‘O’, 그렇지 않은 하루를 보냈다면 ‘X’다. 달력에서 X가 O보다 많아질 때, 정확히는 X가 O의 2배 이상이 될 때 안락사를 선택할 시기가 온 것이다.      


일주일 전 주저 없이 탁구의 안락사를 결정한 것은 어떤 치료로도 극심한 통증을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삶의 질 평가표도 ‘적기’가 왔음을 가리켰다. 하지만 탁구가 시한부 선고를 받으면서 치료 목적이 재활과 연명에서 고통 완화로 바뀌었다. 이는 장기가 망가지는 걸 감수해도 강력한 진통제를 사용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을 의미했다.     


실제로 지난 일주일 동안 탁구의 통증은 눈에 띄게 줄었다. 몸이 쇠약해져 가는 것은 막을 수 없었지만, 일시적으로 삶의 질을 끌어올릴 순 있었다. 잠깐이나마 편하게 잠을 자고, 유모차에 기대 산책을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삶에 대한 탁구의 갈망이 너무나 컸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뚜렷한 의식을 지켰다.     

 

14년 간 지켜봐 온 탁구는 집념이 강한 강아지였다. 한번 꽂힌 것이 있으면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집 근처 상가에 새로운 정육점이 생겼을 때, 코를 킁킁거려 기어코 찾아냈다. 아무리 만류해도 길을 기억해 매일 정육점에 ‘출석체크’를 했다. 고기 한 점 떨어지지 않아도 문 앞을 서성거리는 것만으로 흡족해하며 하루 일과를 완수했다.     



이번에도 탁구가 원하는 바는 명확했다. 매 순간을 살아내는 것, 이겨내는 것이었다. 흔히 ‘지구에서 자신의 죽음을 자각하는 생명체는 인간이 유일하다’고 한다. 실제로 탁구의 인식 체계엔 ‘죽음’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탁구가 어떤 환경에서 숨을 편하게 거둘 수 있을지를 상상하면 결론은 명백했다.  


탁구는 항상 동물병원을 무서워했다. 어렸을 때부터 수의사 앞에 서면 뒷다리를 바들바들 떨었다. 긴 주둥이를 내 겨드랑이 사이에 파묻고 수의사가 진찰을 끝낼 때까지 기다렸다. 육중한 몸은 생각 안 하고 얼굴만 숨긴 모습이 안쓰러워 실소를 터트리곤 했다.


그런 탁구를 병원에서, 그것도 가족이 아닌 수의사 품에서 보내는 건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이미 곤죽이 된 몸을 일으켜 차에 태우고, 병원까지 끌고 가 차가운 진찰대 위에 올려놓는 것은 상상 이상의 정신적 고통을 줄 것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맞는 죽음이 불안과 공포로 남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안락사가 예정된 당일. 긴 밤을 지새우며 수십 가지의 경우의 수를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여러 수의사들이 권고하는 안락사의 기준을 종합해도 모두 들어맞았다. 그럼에도 객관적 수치로 치환할 수 없는 영역이 있었다. 각각의 생명이 가진 개별성이다. 시한부 반려견의 증상은 유사해도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과 반응은 제각각이다. 이것을 잘 알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보호자다.      


오랜 고민 끝에 탁구의 안락사를 취소했다. 예정된 시간이 임박해서야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그럴 줄 알았다”며 안도하는 수의사의 반응도 그제야 이해가 갔다. 아마 수많은 보호자들이 안락사의 문턱 앞까지 가서야 그 선택의 의미를 깨달았을 것이다.     


죽음의 모래시계가 잠깐 멈춘 것 같았다. 이젠 어떤 모습으로 죽음이 탁구를 데려가도 담담하게 배웅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땐 미처 알지 못했다. 생명이 죽음만큼이나 잔인해질 수 있다는 것을. 생명과 죽음은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쌍생아이며, 결국은 모두 자연의 선물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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