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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발바닥 Oct 15. 2022

10. 마지막 배웅

14살 닥스훈트의 투병일지

경기도에 위치한 반려동물 장례식장. 화장을 기다리는 동안 발코니에서 찍은 사진.

죽음은 허무하다. 한 번의 날숨으로 벅찼던 삶이 증발해버린다. 오랜 기간 사랑했던 존재의 사체 옆에 앉아있으면 영혼의 존재를 믿고 싶어진다. 몸은 그릇일 뿐이고 영혼은 저 멀리 승천했다고, 그렇게 몇 천년동안 인류의 조상이 스스로를 세뇌했던 이유를 문득 깨닫게 된다. 그렇게 믿지 않으면 괴로우니까.      


죽은 탁구의 몸은 이질적이었다. 박물관에 전시된 박제 동물 혹은 밀랍 인형처럼 모든 생명력을 소진한 채 껍데기만 쓰고 있었다. 영혼은 이미 저 멀리 달아나버린 것 같았다. 가만히 보고 있어도, 손으로 만져 보아도 죽음이 이해되지 않았다. 14년을 함께 했는데 한순간 연기처럼 증발해버렸다. 허무했다.


한참을 탁구 옆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이제 뭘 해야하지. 관성처럼 2달간 간병만 했다. 이젠 그 대상이 없었다. 꼭 과녁을 잃은 화살 같았다. 그 사이 탁구의 몸이 식고 있었다. 한겨울에 탁구의 몸은 화로 같이 따뜻해서 항상 끌어안곤 했었다. 이제 그 온기는 없었다.


숨을 거둔 탁구의 모습. 반려동물 장의사가 안내한 대로 사체를 수습했다.


기계적으로 반려동물 장례식장에 전화를 걸었다. “오늘 소화할 수 있는 일정은 모두 끝났다”고 했다. 꼬박 12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처음엔 강제적으로 주어진 시간이 불편했다. 최대한 빨리 화장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장의사는 “반려견이 숨을 거둔 후 48시간 까지 부패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친절하게 설명했다.


강제로 주어진 시간에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차가운 사체 옆에 누워 얼굴을 마주했다. 탁구는 눈을 뜬 채 죽었다. 엄지와 검지로 열린 눈꺼풀부터 모아주려 했지만 쉽게 닫히지 않았다. 몇 번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아직도 보고 싶은 것이 많구나’싶었다.


장의사가 안내한 절차대로 사체를 수습했다. 이미 사후 경직이 시작되고 있었다. 목이 꺾이지 않도록 수건을 베개처럼 말아 받쳤다. 바깥으로 나와 있는 혀를 입 안에 넣은 후 얇은 수건으로 어금니 쪽을 고정시켰다. 몸이 딱딱하게 굳어 이빨이 혀를 짓누를 경우 피가 흐를 수 있어서다. 코와 입 등 구멍을 수건으로 막고 수시로 닦았다.


반려동물 장례식장 추모관. 평소 탁구가 좋아했던 장난감과 간식 등을 두고 마지막 인사를 했다.


밤새 탁구의 몸을 젖은 수건으로 깨끗하게 정리했다. 산책을 하지 못해 길어진 발톱도 깎아주고, 발바닥에 난 털도 잘라줬다. 머리도 쓰다듬어 보고, 배도 문질러 봤다. 손등으로 부드러운 목덜미를 쓸며 이젠 아프지 않길, 행복하길 바랐다. 그렇게 몇 시간을 곁에 머문 후에야 ‘실체적 이별’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화장은 경기도 광주시에 있는 반려동물 장례식장에서 했다. 모든 절차는 간소화했다. 가족과 함께 짧게 추모하는 시간을 가졌다. 밤새 곁을 지켜서인지, 생각만큼 눈물이 나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화장을 하기 위해 화로로 들어가는 탁구를 보니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화로의 문이 닫히면 이제 이생에서는 영영 볼 수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깡마른 몸을 눈에 가득 담았다.  혼자 가는 길 외롭지 않도록 편지와 간식을 머리맡에 놓았다. 화로가 닫혔다. 불씨가 피어오르더니 화로를 가득 채웠다. 미리 마련된 장소에서 1시간을 기다리자 장의사가 찾아왔다. “화장 절차를 마쳤으며, 유골을 분쇄하기 전 보시겠냐”며 물었다. 그리곤 “그 모습이 불편할 수 있어 보지 않아도 된다”는 말도 덧붙쳤다.  


화장을 위해 화로로 들어가기 전 탁구의 모습.


기꺼이 보겠다고 했다. 거대한 화로가 열렸다. 1시간 전 탁구가 누워있던 자리엔 회색 뼛조갓이 흐트러져 있었다. 형태를 제대로 확인할 수 있는 건 두개골뿐이었다. 사막 한가운데 놓여진 야생 동물의 뼛조각처럼 적나라했다. 부드럽던 털도, 올망졸망한 눈도 모두 타버렸다.


장의사가 화로 옆에 서서 손으로 가리켰다. 그는 “장기는 모두 타버려서 검은 재가 됐다”고 설명했다. 뼛조각 아래에 깔린 검은 재를 봤다. 모닥풀이 허물어지며 남긴 잔해 같았다. 이상하게 속이 시원했다. ‘그토록 탁구를 괴롭히던 암세포도 불구덩이에서 타버렸겠지.’ 그것이면 충분했다.


뼛가루는 작은 항아리에 담겨 나왔다. 그 항아리를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갔다. 언젠간 땅에 묻어주겠지만, 아직은 보낼 수 없다. 거실의 가장 잘보이는 진열장에 놓아뒀다. 그리울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뼛가루를 만져본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그땐 자유롭게 보내줄 수 있을 것 같다.


이별을 한 지 수개월을 지났지만 아직도 질긴 감정을 조금씩 씹으며 소화하고 있다. 한 번 반려견을 떠나보내면 다시는 키우지 못한다는 말을 들은 적 있는데 이제야 실감이 난다. 집이 텅 비어있다. ‘영속적인 부재’란 말로밖에 표현이 되지 않는다. 작별인사가 언제 끝날지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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