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살 닥스훈트의 투병일지
존엄한 죽음엔 시간과 노동, 그리고 돈이 필요하다. 사람도, 반려견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동물들은 때가 되면 알아서 눈을 감는 게 아니냐’고 묻겠지만, 죽음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노견의 말년은 호스피스 병동에서 가쁜 숨을 연명하는 노인의 삶과 다를 바 없다. 간병하며 희생할 누군가가 없다면, 목숨의 줄기는 얇아진다.
간병인의 일과는 고된 노동의 연속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손이 가지 않는 곳이 없었다. 잘게 부순 밥을 만들고, 독한 가루약을 먹이고, 오줌을 쌀 때마다 부축해주고, 대소변 실수를 하면 청소하고, 오물이 뭍은 몸을 씻기고, 욕창이 생기지 않게 몸을 뒤집어주고, 차에 태워 병원을 오갔다.
몸이 피곤한건 참을 수 있었다. 가장 힘든 건 희망고문이었다. 어떤 의학적 처방이 일시적인 효과를 보이면 병이 호전될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희망에 리본을 달아 곁에 묶어두지만, 결속의 매듭은 금세 벌어진다. 매복하고 있던 병은 기다렸다는 듯 급습하고, 희망의 풍선은 순식간에 터져 허공으로 날아가 버린다.
시간이 갈수록 탁구의 병세는 악화됐다. 척추는 곱추처럼 굽었고, 발목은 종잇장처럼 팔랑거렸다. 움직이고 싶을 땐 뒷다리를 질질 끌며 기어가는데, 꼭 그 모습이 몽둥이에 맞은 인어공주 같았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재활 동물병원을 수소문했다.
침 치료로 가장 유명한 한방동물병원을 찾았다. 척수 아래 인대의 힘을 키워 증상을 개선시키는 방식으로 척추디스크를 치료한다. 초진까지 꼬박 10일을 기다렸지만, 오랜 기다림이 무색하게 탁구의 침 치료는 3분 만에 끝났다. 수의사가 앞발에 침을 놓는 순간 탁구가 미친 듯이 몸을 흔들며 오줌을 지렸다. 얼굴이 마분지처럼 구겨졌다.
수의사가 즉각 치료를 중단했다. 이런 이유로 10마리 중 1마리가 집에 돌아간다고 했다. 그는 몹시 안타까워하며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줬다. 탁구는 경추·척추가 모두 아픈 다발성 증상을 보이기에 수술을 결정해도 성공 확률이 높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비용도 MRI와 CT 촬영, 입원, 재활까지 1천만원 이상 나온다고 했다.
그대로 좌절할 수는 없었다. 새로운 병원을 찾아 나섰다. 재활과 통증 완화 치료, 응급 수술이 가능한 2차 동물병원을 물색했다. 완벽한 병원은 없었다. 후기가 좋은 병원도 끝내 반려견을 살리지 못했다는 오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결국 선택의 문제였다. 병원 거리와 규모, 의료진의 전문성, 보호자들의 평판, 치료 비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우선순위를 정했다.
고심해서 고른 병원은 차로 집에서 15분 거리였다. 수술과 재활을 전문으로 하는 2차 동물병원인만큼 척추 수술 경험도 많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소규모 동물병원과 달리 마취성의 진통제 처방도 가능했다. 초진까지 또다시 일주일을 기다렸다.
긴 기다림 끝에 탁구의 마지막 주치의가 될 수의사를 만났다. 그의 소견도 희망적이지 않았다. 경추·척추뿐 아니라 앞 어깨에 극심한 통증을 호소해 종양이 의심되며, 뒷다리 연골 상태도 좋지 않다고 했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를 살든 의식 없이 병상에서 누워있다 가게하고 싶지 않았다. 하루라도 더 ‘강아지다운’ 삶을 살게 하고 싶었다. 연명 치료를 위해 할 수 있는 것부터 해보기로 했다.
극저온 치료와 적외선 치료부터 했다. 통증 완화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앞발에 마약 성분의 ‘팬타닐 패치’도 붙였다. 암 말기 환자에게 처방되는 패치였다. 수의사는 “마약패치가 효과가 있는지 지켜보자”고 했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그로부터 며칠간 탁구는 사경을 헤맸다. 몸을 부르르 떨며 고통을 호소했다. 식사까지 거부했다. 평소 “임신한 것 아니냐”는 오해를 살 정도로 식탐이 많은 강아지였다. 근육도 탄탄하고 배도 빵빵했다. 그러나 이젠 가장 좋아하던 닭가슴살 앞에서도 초점 없는 멀건 눈망울로 허공만 응시했다.
이번엔 수의사가 “스테로이드 주사를 써보자”고 했다. 스테로이드 주사는 극심한 통증을 완화시키는 데 효과적이지만 그만큼 강력한 약물이기에 섣불리 사용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시간이 갈수록 선택지가 급격하게 줄어들어 가능한 비수술 치료를 모두 시도해야 했다.
스테로이드 주사도 효과가 없었다. 탁구가 잠시나마 올곧게 서고, 편하게 자는 듯 하더니 금세 원래 상태로 회귀했다. 사흘의 기적이 막을 내렸다. 극도로 예민해진 탁구는 나의 손길마저 거부했다. 몸에 손만 갖다 대도 으르렁거리며 누런 이빨을 드러냈다.
악화되는 병세에 비례해 나의 신경도 날카로워졌다. 하루에 3시간도 편히 자지 못했다. 고통을 호소하는데, 고통을 덜어줄 수 없었다. 하루는 애틋하다가 하루는 원망스러웠다. 감정이 수시로 뒤집혔다.
그동안 보호자로서의 존재 의미를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에서 찾았다. 밥을 먹여주고, 몸을 씻겨주고, 화장실에 데려다주고. 이 모든 행위가 핏줄처럼 서로를 연결했다. 그러나 이젠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허무감과 상실감이 엄습했다. 깜깜한 지평선에 쳐진 거미줄에 꼼짝없이 걸려 죽길 기다리는 무력한 벌레 같았다. 아직 탁구를 잃지 않았는데, 가슴 깊은 곳에서 이미 잃어버린 것 같았다. 그쯤 되니 솔직해졌다.
‘고통받는 걸 그만보고 싶어.’
수의사에게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