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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유배일지] 생생한 생크림 새우

41일차

by 태희킷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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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0. 31.


천장이 낮아 절대로 상반신을 일으킬 수 없는 2층 침대에서 눈만 멀뚱히 뜨고 있다. 새벽에 손전화를 열심히 찾다가 없어서 포기했는데 알람이 울릴 시간이 되니까 바지 왼쪽 주머니에서 바르르 떨고 있다. 문을 슬쩍 열어보니 비는 안 오길래 손전화로 오늘 날씨를 확인했더니 비가 온단다. 다시 문을 빼꼼 열어보니 이번엔 비가 내린다.


조식으로 나온 참치 주먹밥을 씹어 먹고 게하를 나오는데 길 건너에 우리가 타야 할 버스가 신호에 걸렸다. 륙지에서는 장화신은 고양이 눈을 하고 버스 앞문을 두드려도 기사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셨을텐데 Only Jeju의 기사님께서는 쾌하게 열어주셨다. 캬. 앤트러사이트 라는 카페에 왔다. 오픈시간 전에 도착하는 바람에 비를 맞으며 입구쪽을 배회하는데 잘생긴 사내가 나와서 개를 무서워하지 않으시다면 들어오시겠냐고 묻는다. 꼬리를 쉼없이 흔들던 개들은 내 무릎만 몇 번 핥더니 금방 관심을 잃고 떠났다. ㄱㄹㅇ을 따라서 카페 이곳저곳 사진을 찍다가 금방 지쳐서 만화책을 읽다가 멋진 말을 주웠다.


"사람들은 행동을 취하기 전에 항상 핑계를 댄단다. 좋은 핑계도 나쁜 핑계도 없어. 핑계를 대며 합리화하려는 사람들은 이미 진 거야."


바람이 그대로 통과하는 정류장에서 제자리걸음으로 기다리다가 모슬포로 가는 버스를 탄다. 짬뽕이 유명하다는 홍성방에서 세트메뉴를 주문했다. 다른 건 다 고만고만한 맛이었는데 '크림새우'는 정말 새로운 맛이었다. 당연히 크림소스를 몸에 바른 새우들이 나올 줄 알았는데 '생'크림에 파묻힌 새우들이 나왔다. 짬뽕이 나오기 전에 집어먹을 땐 밥상에서 먹기엔 너무 달다고만 느꼈는데 짬뽕과 함께 먹으니까... 칼칼한 김치찌개를 먹고 있는데 갑자기 몽쉘이 통째로 입에 들어오는 맛이다. 신기하다 못해 신비한 이 맛에 대한 다른 표현을 찾아보려 애썼지만 블로거 언니들은 다들 크림새우만은 피해가셨다. 그와중에 제주에서 먹는 짬뽕은 왜 하나같이 다 짠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크림새우의 충격을 걷어내보려 모슬포항을 걷는데 지난 번에 다 돌지 못한 송악산 이정표가 보인다. 바람을 뚫고 송악산을 향해 30분 정도 걷다가 마음을 달리 먹고 방향을 돌려 택시를 탄다. 지난 번에 왔을 때보다 바람이 덜 불어서인지, 긴바지를 입어서인지 풍경이 훨씬 눈에 잘 들어온다. 말이 나올 때마다 말에게 말을 거는 ㄱㄹㅇ과 건너편 산방산이 더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천천히 한 바퀴를 돌고 있는데 저 앞에서 사람들 몇 명이 되돌아 온다. 어떤 외국인 아줌마 한 분이 길이 없다고 했다는데 길이 없으면 그 전에 표시가 있지 않겠냐는 생각에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한 바퀴를 다 돌지 못하고 되돌아간 분들을 생각하면 가슴 아플만큼 반짝반짝한 풍경이 이어진다.


중문까지 가기엔 너무 먼 것 같아 근처 밥집을 찾다가 구억리 라는 곳까지 갔다. 가는 택시 안에서 기사님은 여긴 완전 시골이라면서, 뭐 없을 거라고 자꾸 불안하게 했는데 와서 보니 정말 핵시골이다. 빌어드실 신뢰할 수 없는 네이버 블로그 리뷰가 다 망해버렸으면 좋겠다. 블로그도 그렇고 제주도 그렇고 돈 준다고 다 팔아버리니까 문제다아아아아. 더 어두워지기전에 그냥 탄산온천으로 가기로 한다. 버스를 두 번 타야하는데 두 번째 버스는 올 생각을 안 한다. 다시 택시를 탔다. 한 시간 사이에 택시를 두 번 탔고 버스를 한 번 탔지만 아직 밥을 먹지 못했다.


탄산온천 앞에 있는 '1인분 2만 7천원짜리 고깃집'을 지나쳐 치킨집에 들어갔다. '점심메뉴 김치찌개'라고 분명하게 써있었지만 찬 바람 맞으며 하루종일 돌아다닌 몸뚱이들에겐 바삭한 치킨껍질보다 뜨끈한 국물이 필요했다. 코를 훌쩍대면서 뚝배기를 깨끗하게 비우고 고산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11월에 이사하기 전에 인사도 할 겸 한 번 들러야지 들러야지 했는데 찌개 국물에 올래 한 병을 먹고 갈 줄은 몰랐다. ㄲㄲ 3인용 텐트에서 널부러져 내일 한라산에 갈 걱정을 잠깐 하다가 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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