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일차
2016. 11. 1.
출근길 긴 머리가 머금은 물기를 빠르게 털어내고 있는 여자 뒤에서 줄을 서있다가 중문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중문에서 영실매표소로 가는 버스시간도 안 알아보고 그냥 왔는데 11월이 시작되는 오늘부터 배차시간이 바뀌어 버스가 오려면 시간이 꽤 남았다. 하나로마트에서 물 두 병과 해바라기씨, 씨리얼, 천하장사 소시지를 사서 가방에 잘 쑤셔 넣었다.
영실매표소까지 버스로 올라가 택시를 타고 탐방로 입구에 내렸다. 내리자마자 와르르 쏟아지는 산바람에 자연스레 등을 돌리게 된다. 볶음김치가 들어있는 주먹밥을 사먹고 옷을 하나씩 더 껴입었다. 춥지 않을 거라 몇 차례 최면을 걸고 한라산으로 첫 발을 뗀다. 열심히 올라가며 주위를 둘러봐도 날씨언니들 이야기했던 울긋불긋한 단풍은 어디에도 없다. 인터넷에서는 10월 29일이 한라산 단풍의 절정이라고 하던데 이틀만에 벌써 결말에 이른 듯하다.
하늘과 더 가까워지면서 체온이 조금씩 오른다. 산바람은 여전히 차가워서 코끝이 점점 빨갛게 얼어가고 있다. 아까 버스안에서만 해도 탄산온천의 힘을 받아 자신이 이뤄낸 훌륭한 화장에 만족해하던 ㄱㄹㅇ은 이제 코찔찔이가 됐다. 새벽에도 춥고 바람이 엄청 불더니만 산 윗쪽 나무에는 서리가 내려 앉았다. 나무를 톡 건드리면 눈발처럼 날릴까 싶어 발로 차봤는데 나뭇가지 몇 개가 부러졌다. 서리가 앉은 게 아니라 그냥 통째로 얼어버렸나보다. 나무한테 미안하다...
제주방송에서도 한라산을 찍으러 나왔다. 오늘 저녁 뉴스에 나올 장면을 찍나보다. 구름떼가 산머리를 엄청난 속도로 지나가는 걸 기다렸다가 셔터를 타타타타탁 눌러대는 사진기 아재들도 많다. 춥긴해도 맑은 하늘이 보이는 오늘 한라산에 오게 되어서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산위에 다다르니 자꾸만 올라온 길을 내려다보게 된다. 10분 전에 호들갑스럽게 사진 찍었던 곳이 구름에 갇혀있다. 아까 지나올 때 단풍나무는 저것뿐인가 싶던 나무 몇 그루는 멀리서 더욱 눈에 잘 띈다. 얼음나무와 단풍나무가 한 눈에 들어오는 겨울산과 가을산을 동시에 보고 있으려니 코끝이 찡하다. 절대 추워서 그런 건 아니다.
영실코스는 어차피 백록담을 볼 수 없어서 윗세오름에서 사진을 한 장 찍고 컵라면을 먹었다. 라면을 만원에 팔더라도 꼭 사먹어야겠다고다짐했던 두 코찔찔이들은 천 오백원이라는 은혜로운 가격에 놀랐다. 한 사발 비우고 ㄱㄹㅇ의 라면도 절반 넘게 집어 먹었다. 쓰레기를 비닐에 담아 가방끈에 잘 묶었다. 아까 영실매표소에서 우리가 택시를 탈 때 분명 걸어 올라가고 계셨던 스님 둘은 이미 어리목 코스로 내려가고 있다. 한 분은 안경을 다른 한 분은 레옹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는데 보이는대로 엄청난 사람들인 듯 하다. 저 두 사람은 아마 등산로가 아니라 나무를 타고 왔을 거라고 떠들어대는 나를 두고 ㄱㄹㅇ이 먼저 하산을 시작했다.
나무데크로 완만하게 시작된 어리목 하산길은 가만히 서있어도 다리가 후덜거리게 하는 돌무더기길로 끝이 났다. 구르지 않고 내려온 게 다행이다. 불쌍한 내 다리는 설악산 오색코스를 기억하는지 다 내려와서도 부들부들 거린다. 동문시장에서 고민 끝에 들어간 국밥집에서 짠국밥을 먹고 사람이 없는 설빙에서 커피를 마셨다. 제스피에 가서 스트롱에일에 소세지를 씹어넘기고 스탭이 술마시러 떠났다는 마이크임팩트 제주본부에서 하루를 끝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