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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희킷이지 Feb 19. 2017

[탐라유배일지] 괜찮은 생일

53일차


16. 11. 12.


어젯밤 썰어놓기만 한 우유케잌 한 조각을 번쩍들어 접시에 옮겼다. 창문에 비친 나와 눈을 맞추고 셀프 축하를 건네며 하루를 시작한다. 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서 입에 해바라기씨를 한 가득 넣었다. 씹지 않고 씨를 둘러싼 초콜릿을 살살 녹이면서 어디에 갈지 생각해본다. 매년 그렇듯 조용하면서도 의미있는 생일을 보내고 싶어 여행을 하겠다고 나오긴 했는데 사실 그닥 갈 곳이 없다. 버스터미널 근처 영화관에서 <닥터 스트레인지>를 볼까 하다가 모슬포로 가는 일주버스를 탄다.


10시 40분쯤 승선신고서를 쓰고 줄을 섰다. 내 앞에 열명 남짓 서 있는데 매표하는 아저씨가 "스무 자리 남았습니다!"라고 외쳤다. 11시 10분 배를 충분히 탈 수 있겠다 싶어 마음을 다해 기뻐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줄 세번 째에 서있던 아저씨가는 티켓 13장을 한 번에 손에 쥐고 떠났고 잠시 설렜던 나머지 사람들은 12시 30분 배를 타게 됐다. 아까 지나치며 '설마 표가 없어서 여기 오진 않겠지' 라고 생각했던 근처 카페에 들어가 밀린 일기를 쓴다.


탄산마냥 꿀렁꿀렁 끓어 넘치는 듯한 물거품을 멍하니 쳐다보면서 대한민국 최남단 마라도에 간다. 2층에 올라가 바닷바람을 맞아볼까 생각도 했지만 쓸데없이 들고 온 노트북때문에 가방이 무겁기도해서 그냥 얌전하게 앉아있다. 30분만에 도착한 마라도의 선착장엔 섬을 오고가려는 사람이 넘쳐서 거의 뭐 피난길같이 어수선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짜장면집들이 보이는 오른쪽 길로 향하길래 억새밭이 있는 반대방향으로 출발했다. 


1시간이면 전부 돌아볼 수 있다는 마라도는 생각보다 작았다. 100명이라는 마라도 주민들이 사는 집이 그렇게 많이 보이지 않아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억새가 깔린 해안길을 따라가다가 동글동글하게 생긴 성당을 지나니까 대한민국 최남단비가 보인다. 벌써 반 바퀴 돌았다. 인터넷에서 그리 좋은 평을 받지 못하는 마라도 톳짜장면을 주문했다. 큰 기대가 없었기 때문인지 몰라도 6000원이라는 가격에 비해 양이 부족한 것 빼곤 내 입안에서는 좋은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2시 반 배를 타고 다시 모슬포항에 오니 왠지 자이리톨 껌을 씹고 라임맛 트레비를 마셔야 할 듯하다.


판포리에 있는 게스트 하우스에 왔다. 짐만 두고 지는 해를 따라 계속 걸어가니까 풍력발전기가 일렬로 서있는 물가가 나온다. 캔맥주 하나 마시면서 사진기 배터리가 탈탈 털릴때까지 사진을 찍었다. 곧 까매진 하늘에서 풍력발전기는 모습을 감추고 작은 불빛만 깜빡인다. 그 불빛이 차례대로 반짝반짝 거려서 별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포구에서 메로나 하나 까먹으면서 그걸 지켜보고있다가 돌아온 게하엔 부모님 또래의 게스트님들이 모여계신다. 


"어 앉어" 라는 멘트로 시작된 술자리에 그대로 앉아 계속 술을 받아 마셨다. 중간중간 '코리아 이대로 좋은가' 라는 주제로 토론 배틀이 벌어졌지만 나는 허공만 보면서 계속 잔을 넘겼다. 김광석 노래에 맞춰 춤을 추시는 모습을 보면서 낄낄대다가 노래가 이글스로 바뀌었을 때슬그머니 방으로 들어왔다. 작년 이맘때의 일기장도 못 보고, 어제 산 어라운드는 포장도 못 뜯었지만... 의도한대로 안 돼서 더 괜찮은 생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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