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일차
2016. 11. 22.
좋은 날씨는 아니라 잠시 고민하다가 우도 가는 배를 타러 성산항에 왔다. 주말도 아닌데 매표소에는 사람들로 꽤나 북적였고 나도 잽싸게 줄에 합류했다. 우도 갔다가 나오실 거냐는 당연한 질문에 네엡!!하고 대답했는데 그럼 표를 못산다고 한다. 내가 탈 배는 11시 배였고 오늘은 바람이 많이 불어 나오는 12시 배가 마지막이란다. 그럼 11시에 들어가서 12시에 나오겠다고 했더니 "12시 배는 이미 들어가신 분들로 자리가 다 찼죠."
잠시 고민하다가 고민을 ㅈㅅㅇ형한테 넘겨드렸다. 물론 나도 6년만에 우도를 가는 거라 설레긴 한데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갈 수 있을 것만 같다. 내일이면 다시 서울로 가는 형은 표정없이 눈만 빠르게 움직이더니 짧게 이야기 했다. "가자!" 우리가 탄 11시 배에는 우도 주민을 제외하고 정확히 네 명의 여행객이 탔다. 우리를 제외한 두 분은 캐리어를 끌고 오는 걸 보니 아예 처음부터 우도에서 1박을 할 계획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좌석에 얌전히 앉아있는데도 양쪽 창문으로 바다가 다 보일정도로 배는 바이킹마냥 휘청거린다.
우도항에는 섬을 탈출하려는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고 있다. 섬을 떠나는 쪽이 아쉬워야 할 것 같은데 떠나는 배를 타려는 사람들의 표정이 너무 밝아서 뭔가 기분이 이상하다. 스무 살, 나에게 우도의 첫 기억은 배에서 내리자마자 어떤 아줌마가 우도 땅콩을 손에 한 주먹 쥐어주던 장면이다. 6년 후 다시 찾은 우도에는 더이상 우도 땅콩이 유명하다면서 먹어보라는 사람은 없었다.
추운 날씨에 섬고립에 이어 몸뚱이 누일 곳도 없어질까봐 빠르게 게스트하우스부터 잡고 스쿠터를 빌리러 나왔다. 건물 옆에 붙어있어도 바람이 몰아치는 걸 보니 운전대를 잡기가 무섭다. 하나만 빌려 뒷자리에 올라 추천 받은 흑돼지 수제버거를 먹으러 간다. 12시쯤 도착했더니 매니저라는 분이 나와서 이야기한다. "12시가 마지막 배라서 이제 영업종료해요.^^" 섬을 거의 한 바퀴 다 돌 동안 이와 비슷한 멘트를 서너 번 더 들을 수 있었다.
빛이 쫙 들어오는 해안도로를 스쿠터로 달리는 상상을 하고 왔는데 귓가에 바람 부서지는 소리를 넘어 온 몸에 부서지는 소리가 난다. 방지턱이 없어도 추워서 덜덜대고 있다. 여러군데 식당을 물색하다가 다행히 열린 곳을 찾았다. 점심을 먹고나니 배가 끊기면 온동네가 문을 닫는 이 섬에서 저녁은 또 어떻게 먹어야 하나 걱정이다. 사장님이 섬 윗동네에 백반집 하나를 추천해주시길래 섬을 마저 돌고 윗동네로 올라갔다. 영업시간을 여쭤보려고 들어갔는데 안에 계신 분은 한국말을 못 하시는 듯 하다.
내가 안에서 바디랭귀지를 구사하고 있을 때 밖에선 하나로마트 앞에 서계신 어떤 아주머니가 "백반!!! 백반!!!"을 외치시더니 "한국말 못 해!!!"라고 소리 치셨다고 한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먹을 거리를 사러 하나로마트를 갔다가 그 아주머니를 다시 만났다. 아주머니는 우리를 알아보고 저 집 백반 맛있게 한다고 추천해주셨다. 저녁에는 백반 말고 다른 메뉴들도 된다고 한다. 두 분에게 추천을 받았으니 믿음이 생겨 저녁을 그 집에서 먹기로 한다.
뜨끈한 방에 누워 조금 눈을 붙이다가 더 깜깜해지고 추워진 골목길을 달려 식당에 간다. 콧김을 내뿜으면서 식당문을 연다. 가볍게 김이 서린 안경을 통해 사장님이 보인다. 아까 하나로마트에서 만난 아주머니다. ㄷㄷㄷ 사장님의 셀프 맛집추천사실에 당황하면서 자리에 앉았다. 메뉴를 보고 있는데 보다 못한 사장님이 정해주신다. "백반 먹을 거지? 백반이 제일 나아. 백반 두 개!" 사장님은 연이어 들어오는 손님들에게도 똑같은 멘트로 백반을 먹였다. 맛은 있어서 다행이었는데 아직도 자연스런 셀프추천 충격은 가시지 않는다. 점심을 먹은 식당 사장님도 한 가족인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품으며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