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일차
2016. 11. 30.
된장찌개를 끓였다. 어젯밤 냉장고에서 재료를 대충 봐두긴 해서 큰 문제없이 평범한 맛을 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흐음... 두 번 떠먹어도 비범한 맛이다. 누런 국물은 간이 된 물 맛일 뿐이지 전혀 찌개 맛이 아닌 듯하다. 국물이 이 모양이니 건더기 역시 익은 것뿐이지 국물과 하나가 된 맛은 아니다. 아 그냥 맛이 없다. 일단 제주시에 일찍 나가야 해서 밥 위에 찌개를 두 국자 올려 뜨거운 맛으로만 밥을 넘기고 나온다.
버스에서도 의문이 풀리지 않아서 우리집 기황후와 친구들에게 된장찌개 상담을 신청했다. 심각하진 않지만 사건의 경위부터 설명해야 할 것 같아서 내가 뚝배기에 한 짓을 천천히 돌이켜보았다.
1. 먼저 감자가 잘 안익을 것이 걱정돼 깍둑 썬 감자에 참기름을 넣고 살짝 볶았다.
2. 된장과 다진마늘을 넣고 육수를 부었다. (여기서 육수는 멸치와 다시마를 못 찾아서 아쉬운 내 마음만 담은 맹물이다.)
3. 한소끔 끓고나면 거품을 살짝 걷어내고 버섯을 넣는다. (여기서 버섯은 수상해보이는 양송이 버섯을 넣었다. 냉장고에 굴러다니길래.)
4. 먹기 좋게 썬 양파를 넣고 국물 맛을 한 번 봤다. 이때부터 좀 불안해서 다진 마늘을 좀 더 넣고, 마늘 가루도 털어넣었다.
5. 그랬더니 그냥 마늘국 맛이 나길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두부와 대파를 넣고 다시 한 바탕 끓여냈다.
내가 의심했던 부분은 '마음만 담은 육수', '수상한 양송이 버섯', '마늘폭탄'인데 상담자분들은 큰 문제는 없을 거라며 내 손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내가 원했던 건 노맛 된장찌개를 다시 탄생시키지 않을 근본적인 해결방안인데 한 친구는 버리고 다시 끓이라고 했고, 기황후는 '너 평소대로 라면스프에 손 대'라고 하셨다. 내 주위에 좋은 상담자가 없어서 나의 된장찌개가 항상 노맛일 것 같은 두려움이 생겼다.
제주시에 올래국수집에 왔다. 먼저 도착한 ㅈㅎ님이 센스있게 주문을 해놔서 자리에 앉은지 얼마 안돼서 국수 두 그릇이 나왔다. 지난 번에 먹은 자매국수 보다 국물이 조금 더 진한... 그니까 조금 더 국밥 국물 맛이다. 그래도 더 먹음직스러운 노란면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꽤나 두께감 있게 썰어진 고기 때문에 턱이 좀 삐그덕 대긴했지만 이집은 국수에 고기가 이렇게 많이 나오니까 굳이 돔베고기를 안 파는구나 싶다.
ㅈㅎ님 비행기 시간까지 조금 여유가 있어서 근처 설빙에 왔다. ㅈㅎ님이 가져 온 보리빵을 한 입 물고 크레마대신 보글보글 거품을 올린 신개념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심심한 보리빵이 꽤 맛이 좋아서 뜯어먹다가도 문득문득 집에 두고 온 노맛 된장찌개 걱정이... ㅈㅎ님은 탐라국에서 이런저런 고민을 떨치고 (대신 오메기떡 & 보리빵을 싸들고) 간단다. 그 얘기를 듣고 나의 유배가 끝날 시점을 떠올려보니 나는 왠지 또 다른 걱정만 챙겨서 돌아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내에 온 김에 삼성 서비스 센터에 들러 손전화를 고쳤다. 하지만 고치지 못 했다. 이미 육지에서 액정문제라며 9만원 주고 액정을 바꾸라는 진단을 받았으나 나는 수술비용이 부담스러워 자가치료를 계속 해왔다. 그러던 중 액정 위쪽을 꾹 누르면 상태가 호전된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수술비가 청구되지 않게 그저 액정을 열었다 다시 꼭 닫아달라고만 부탁드렸다. 엔지니어 아저씨는 되게 자신 없어하면서 '일단은 열었다 닫으니 지금은 괜찮긴 한데...' 라고 이야기했지만 나는 완치를 확신하고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서비스센터를 나와 200발자국 정도 걷고서 슬쩍 다시 손전화를 눌러봤는데 액정은 여전히 삐꾸다. 적당한 비를 맞으면서 이마트에 들어가 철지난 여름 츄니닝이랑 아이폰 케이블을 하나 사왔다. 이제 그만 아이폰을 받아들여야겠다.
비는 그쳤지만 여전히 꾸물꾸물 거리는 지금, 일몰을 보러 수월봉에 오른다. 해질 시간은 지났는데 구름 탓인지 하늘이 물들지가 않아서 에라이 하고 돌아오는데 뒤돌아보니 아름다움이 폭발한다. 언제쯤 수월봉에서 제대로 된 일몰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뚝배기에 물을 조금 더 넣고 노맛 된장찌개를 다시 한 번 팔팔 끓여낸다. 기대없이 밥위에 찌개를 끼얹는데... 우리 찌개가 달라졌다ㅠㅠ 아무래도 부족했던 건 재료나 요리법이 아니라 여유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