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일차
2016. 12. 3.
서귀포로 알바를 하러 6시 반에 눈을 뜬다. 밤새 베개에 비벼대는 바람에 눌린 옆머리가 좀 거슬리긴 하지만 일출을 보는 출근길이 나쁘지 않다. 약간 설레기까지 한다. 근데 그 설렘은 오래 못 간다. 중문까지만해도 버틸만한데 시외버스터미널까지 오려니까 막 몸이 뒤틀릴 것만 같다.
다른 알바들과 함께 담당자를 쪼르르 따라다닌다. 경광봉과 코트, 머리에 전혀 들어갈 생각이 없는 챙모자를 받았다. 이틀짜리 행사의 시작 날인 오늘은 유난히 좀 분주하다 못해 부산스럽다. 정신없는 업무 설명이 대충 끝나고 교대조 편성도 마쳤다. 나는 1라운드, 2라운드 지명도 받지 못해서 처음부터 쉬는 타이밍이다. 본격적으로 사람이 들어오기 전에 지명받아야 꿀일 것 같다는 생각에 몹시 실망해 어깨와 입꼬리가 함께 처진다.
오늘 행사는 신축 아파트에서 분양 전 입주예정자들에게 사전점검 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주는 거란다. 귀하신 입주자들을 위해 아침부터 레드카펫을 깐다. 3분 전까지 쉬라고 해놓고선 다시 불러내 레드카펫을 깔라고 한다. 실내에서는 테이프로 붙이는데 보도블럭 위엔 못질이 필요하다. 못과 망치를 내게 쥐어준다. 레드카펫을 살짝 들어 보도블럭의 틈새를 확인하고 왼손에 못, 오른손엔 망치를 든다. 쪼그려 앉아 자리를 잡는 순간 어디선가 팟소리가 난다. 불편한 청바지를 입고 있는데도 추니닝을 입은 것마냥 편해진다. 바지가 터졌다.
가랑이 사이로 느껴지는 한기를 믿을 수 없어 손을 가져다대본다. 흠!! 확실하다. 다가온 담당자에게 목소리를 낮추고 이야기했다. 저 죄송한데 제가 못 박기를 하는 게 불만은 아닌데요. 원래 업무가 아닌 못 박기를 하다가 바지가 터졌거든요. 수선비 좀 주시면 안될까요. 담당자는 내가 집에 가버릴까봐 걱정했다면서 엄청나게 나오지 않는 이상 주겠다고 약속한다.
차라리 차가 끊임없이 밀고 들어왔으면 좋겠는데 지하주차장은 몇시간째 텅텅 비어있다. 아침보다 나아진 거라곤 음악이 흐른다는 건데 음악들이 하나같이 한국인이 사랑하는 졸린 팝송 100선 같다. 이 알바가 끝나려면 아직 두 시간이나 남았는데 이대로 계속 가다간 입간판이 될 것 같다.
성당에서 신부님이 멋있는 말을 해서 적어놓으려 했는데 그뒤로 졸다가 까먹었다. 마침성가로 애국가를 부른다. 나라꼴이 생각나 눈물까지 나려한다. 애국가가 이렇게 슬픈 노랜지 몰랐다. 돌아온 게스트하우스에는 스무살인 듯한 남자 게스트 세 명이 모여 술잔을 맞대고 있다. 그 중 한 명이 워홀을 가고 싶다는 말을 해서 시작된 논쟁이 지금까지 끝나지 않는다. 사실 논쟁도 아니고 그냥 상대가 말하는 동안 묵묵히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만 준비하는 듯한 아주 엉망인 대화다. 아 이쯤되면 일단 누구든 워홀을 떠나고 이야기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잠 좀 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