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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희킷이지 Feb 25. 2017

[탐라유배일지] 시간과 정신의 철봉

78일차


2016. 12. 7.


아끼고 아껴두던 영화 <UP>을 봤다. 영화 초반부 휘리릭 지나가는 칼 할아버지의 결혼생활을 보는데 이래서 어른들도 재밌게 봤다고 하는구나 싶다. 평생 가슴 한 켠에 품고 살던 모험의 꿈을 이루려는 칼 할아버지 보다 '살다보면 따분한 일들이 가장 많이 생각나는 것 같다'는 러셀의 말에 조금 더 마음이 간다. 잊지 못할 순간이라고 감탄사를 내뱉어가며 호들갑 떠는 순간보다 어떻게 해냈는지도 모를 일상적이고 따분한 일들이 뜬금없이 생각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서.    


형이 일하는 막국수집에서 국수를 먹고 나오는데 날씨가 포근하다. 포근하다는 말이 뭔지 몰랐는데 매일 불어대는 이 동네 바람을 맞다가 바람이 잠잠하니까 이 느낌이 포근함인 듯 하다. 자이리톨 껌을 천천히 씹으면서 어슬렁어슬렁 수월봉 걸어간다. 직선도로라고 신나게 속도를 올리는 '하하호호허허'들이 조용한 산책길을 좀 거슬리게 하지만 적당한 빛과 바람덕에 쾌적한 산책길이다.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뷰를 쓰는데 오늘 날씨가 자꾸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오늘은 달리기를 하는 날이라 트레드밀 같은 쳇바퀴 위에서 뛰느니 바깥에서 달리는 게 낫다 싶어 패딩조끼를 입고 나왔다. 나이키 러닝앱을 설치하는데 ios 업데이트를 안 해서 설치할 수가 없단다. 전에 달릴 때 대강 봐둔 3km 반환점을 기준으로 계산하면 될 것 같아 일단 뛰고 있다. 지난 번에 왔던 정자를 지나니까 해안도로가 나온다. 도로 너머로는 낚시하는 사람들도 보인다. 뛰다보니 시경계가 나온다. 뛰어서 서귀포시까지 온 내가 자랑스럽다.


어제부터 ㅅㅈㅎ이 시킨 매달리기를 시도하고 있는데 고작 20초를 버티는게 무척이나 괴롭다. 온기라고 찾아볼 수 없는 냉정한 쇠철봉에 의지해 내 몸을 공중에 띄우고 나면 평소보다 시간이 몇 배는 느리게 흐른다. 그러다 발이 땅을 닿으면 시간은 다시 제 속도를 찾는다. 이쯤되면 턱은 커녕 정수리도 철봉위를 넘지 못 할 것만 같다. 살 빼려고 이 위에 매달려 있는건데 살이 많아서 매달리는 게 더 힘들면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다. 매달릴 때만 살짝 반중력이었으면 좋겠다.


집에 돌아가니 색깔부터 눈길을 끄는 월남쌈이 기다리고 있다. 재료만 준비하면 끝이라는데 륙지집에서 한 번 만들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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