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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유배일지] 낮잠 vs 산책

81일차

by 태희킷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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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2. 10.


지난 번에 친구들이 면회왔을 때 갔던 호텔에서 플라스틱 빗을 가져왔다. 머리를 자주 빗어주면 머릿결이 좋아진다길래 열심히 빗어봤다. 원래 머리카락은 빗한테 져야 맞는 것 같은데... 내 머리카락은 빗살을 부러뜨린다. 벌써 두 번째다. 최대한 열심히 길러서 모발기부하려고 했는데 이대로 가다간 거기서 안 받을 것 같다.


동네 한 바퀴를 돌러 나왔다. 해가 늦게 뜨는 계절에 맞게 밤잠을 충분히(사실 지나치게) 많이 자서 요즘엔 낮에 낮잠 대신 산책을 나온다. 나있는 길따라 별 생각없이 계속 걷다보면 30분-40분정도는 조용히 걷다가 돌아오게 된다. 오늘은 좀 오랫동안 걷고 들어왔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낮잠을 자고 있네. 둘 다 해냈으니 더 좋은 거라고 생각...함


주민센터 위에서 혼자 꾸엑꾸엑 소리를 내가며 운동을 하다가 털레털레 돌아오는데 게스트가 게하에 들어가는 게 보인다. 저녁 밥 대신 빵이랑 과자를 몇 개 사오셨길래 곧 저녁 먹을 거라고 같이 드시면 된다고 말씀드린다. 곧 쉐프가 도착했다. 월남쌈-찜닭에 이어 오늘은 순대볶음이란다. 고산리를 신림순대타운으로 만들어 주겠다며 거대한 철판도 꺼낸다. 아 근데 사진을 안 찍었네.


게스트가 사온 막걸리를 맛보는데 엄청 새콤하다. 이건 뭔가 이상해서 교환하러 편의점에 간다. 세븐일레븐 아저씨가 원래 유산균 막걸리라서 신 것이라는, 탐라인스럽지 않은 논리를 펴시길래 다른 거를 하나 따서 맛보시라고 드려봤다. "아 저게 좀 시긴 하네."


막걸리로 열린 냉장고에서 한라산과 맥주가 쏟아져 나온다. 나는 밥 한 공기 대신이라면서 막걸리만 한 잔 받았다. 눈 앞에서 오고가는 소주와 맥주를 잠시 착잡하게 바라봤지만 금세 머릿속에 26이라는 숫자가 떠올랐다. 순대볶음이 홀로 술을 마크하기에 역부족이어서 게스트와 과자를 사러 나왔다. 단과자와, 아주 단과자, 그리고 아주아주 단과자를 골라오시는 동안 나는 냉동실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메로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아이스크림이 너무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하니까 몸 속의 잉여지방들이 기뻐하는 듯하다. 아 나는 그동안 얼마나 아이스크림을 쉽게, 고민없이 위속에 집어 넣었는가 반성하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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