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94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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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기억이 안 나서 유배일지를 몰아쓰는 거 아님.
밀린 일하느라 대부분의 하루를 비슷하게 보내서 어쩔 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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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2. 19.
ㅈㅎㅇ형이 아침부터 방문하셨다. 순대국밥을 맥이시더니 2월에 보자는 말을 남기고 빠르게 사라지셨다. 그래도 어떻게 된 게 륙지에서보다 섬에서 사람들을 더 자주 만나는 것 같다.
하루종일 비가 내린다. 돈까스를 튀기고 방울토마토에 베이컨을 말아 구워서 빗소리에 어울리는 밥상을 차렸다.
오늘도 닭가슴살은 맛없다. 볶음밥을 했더니 먹을만 하다.
컴컴한 텐트에서 영화를 한 편 보고 자고 싶은데 컴퓨터를 하루종일 보고있던 눈알이 영화를 못 보겠다고 거부한다.
2016. 12. 20.
아침부터 김밥을 우적우적 씹으면서 대체 어떻게 하면 졸업할 때 총장상을 받을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다. 수업이 남지 않은 상황에서 내가 학교와 엮어서 뭔가를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졸업작품 밖에 없으니 졸업작품으로 총장상을 받아야 하는데 아직 해놓은 게 하나도 없어서 불안하다.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엄빠한테는 미리 받는다고 얘기해놔야겠다.
산책 다녀온 뒤로 밀린 일기를 후다다다닥 쓰고 있다. 사실은 마음만 후다다다닥이고 커서는 제자리에서 깜빡이고 있다.
형이 나가고 혼자 남는 날엔 정말 혼자 살면 어떤 느낌일지 자주 생각한다. 나혼자 산다에 나오는 연예인들을 보면 이것 저것 하면서 잘 사니까 꽤나 재밌어 보이는데 그 와중에 외로움이 삐져나오는 걸 발견할 때면 보는 내가 슬퍼진다. 집이 너무 조용하다. 사각사각 면도나 해야겠다.
2016. 12. 21.
아마 올해의 마지막 알바가 될 것 같다. 나무문에 철제 느낌이 나도록 회색 페인트를 바르고 그 위에 부식 페인트를 덧바른다. 실제로 창고였던 이 건물과 더 잘 어울리는 모습이다. 머리 아픈 향을 내는 에폭시를 잘 섞어 헤라로 현무암에 살짝 발라주면 ㅈㅇ형이 돌담을 쌓는다. 돌담작업이 거의 다 끝나갈 때쯤 길게 늘어진 에폭시 몇 가닥이 바지에 묻었다. 아 망할.
3시간 자고 아침 비행기로 탐라국에 온 ㅈㅇ형은 힘들어하더니 한 시간만 차에서 잔다고 한다. 고용인 수면요건을 보장하기 위해 피고용인도 조용히 잔다. 고용인보다 10분 일찍 일어날 수 있게 알람 맞춰놨었는데 고용인이 깨워줘서 일어났다. 아 나란 알바.
2016. 12. 22.
며칠 전 친구들이랑 여행 왔던 ㅇㅈㅎ이 우리집에서 하루 묵고 가기로 했다. 어제는 올레길을 걷다가 비를 쫄딱 맞았다는데 친구들은 날씨 때문에 여행이 망했다며 이미 탐라를 떴단다. 이른 오후에 왔길래 집에서 커피 한 잔을 맥이고 밖으로 나왔다.
혼자서는 무서워서 차귀도 해안길을 안 걸어봤는데 오늘 한 번 걸어봐야겠다. 나오니 바람이 심상치 않다. 얼굴을 내놓고 있으려니 안면의 주름은 다 펴줄 것 같다. 기껏 사진기를 들고 갔더니만 찍을 때마다 스트랩이 이리저리 춤을 춘다. 집에 가고 싶다.
그래도 서쪽동네에 왔으니 일몰은 한 번 보고 가야할 것 같아서 ㅇㅈㅎ을 데리고 수월봉에 갔다. 5시 20분쯤 짙은 구름틈으로 핑크색 빛이 1cm정도 삐져나온다. ㅇㅈㅎ이 사진 찍어야 되는 거 아니냐고 호들갑을 떨길래 빨간 하늘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천천히 기다리라고 했다. 30분 정도 더 지켜보고 있으니까 하늘은 그대로 어두워지고 밤이 되었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날씨 때문에 망했다는 이 여행의 일부를 함께하게 된 것 같다.
치킨을 뜯으면서 쓸데없는 얘기만 했는데 시간이 이렇게 간다.
2016. 12. 23.
터진 바지 수선이 끝났다고 한다. ㅇㅈㅎ을 배웅할 겸 제주시내에 나갔다. 전부터 명성만 듣고 직접 가보진 못했던 우진해장국에 가서 고사리 육개장을 먹는다. 비빔밥 먹을 때도 고사리는 마지못해 먹는 내 입에도 맛있었다. 어차피 고기랑 고사리랑 구분할 수 없도록 다 잘게 찢어놓아서 형태도 알아볼 수 없다. 솔직히 눈 앞에 나올 때까지만해도 큰 기대를 갖지 못하게 하는 비주얼이라서 그런지 맛의 극적효과가 아주 강력하다.
카페에서 ㅇㅈㅎ을 보내고 UFC 게임과 밀린 일을 번갈아 하다보니 시간이 훅훅간다. 금세 영화시간이 다되어서 근처 메가박스로 라라랜드를 보러 왔다. 상영관이 있는 5층에 올라왔는데 영화관이 맞나 싶을 정도로 고요하다. 직원도 손님도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영화 시작 5분 전이 되니 나를 포함해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5관 앞에서 서성인다. 이제는 앞서 상영되던 영화가 끝날 때도 됐을텐데 상영관의 문은 굳게 닫혀있다. 문앞의 가림막도 그대로다.
영화 시작 시간이 지났다. 사람들이 하나, 둘 술렁인다. 용기있는 관객 몇명이 상영관으로 진입하더니 술렁이는 사람들을 친절하게 안내한다. "라라랜드 입장하세요~" 여전히 직원들은 오질 않는다. 관객들이 셀프로 입장안내를 하는 이 상황이 전혀 이해가 안 되지만 어느새 스크린에선 광고가 끝나고 비상구 안내를 하고 있길래 나도 얼른 자리에 앉았다.
정확히 어느 부분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영화가 끝나자마자 메모장을 켜서 '겁나는 거랑 싫어하는 건 다르다.'라고 적어놨다.
집으로 돌아가는 막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급쉬가 마렵다. 버스정류장 뒤쪽은 야외방뇨에 최적화 되어있는 풀숲이다. 모든 게 완벽한데 정류장에서 함께 버스를 기다리는 한 분이 자리에 앉지 못하고 돌아다니신다. 뭔가 생각에 잠긴듯한 표정으로 두리번 거리면서 정류장을 계속 뺑뺑 도는데 그걸 보고 있는 내 머리도 뺑뺑 돌 것 같다. 시내버스 두 대를 그냥 보내는 걸 보니 나랑 같은 일주버스를 타는 게 분명하다. 눈에 보이는 길따라 뛰어 다니다가 또 다른 풀숲을 찾았다. 참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