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탐라유배일지] 해가 저문다

102일차

by 태희킷이지
KakaoTalk_20170108_231418109.jpg

2016. 12. 31.


2016년의 마지막 날이라고 특별히 일찍 일어날 이유는 없는 것 같아서 10시까지 잤다. 옥상에 앉아서 하늘을 보고 있는데 날씨가 좋길래 아침부터 오름에 간다는 ㅅㅇㅈ한테 전화를 했다. 오름에서 내려와 신천목장에 간다길래 쪼르르 따라간다.


탐라국 겨울여행 장소로 손꼽히는 곳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버스를 타고 갈 생각을 하면 어질어질해서 직접가보면 분명 별로일 것이라고 최면을 걸고 있었는데... 멀리서 귤빛이 보이자마자 감탄사가 나온다. 이게 입구인가 무지 의심스러웠지만 (옆에 있던 개 두 마리가 유난히 짖긴 했음) 돌담을 가볍게 넘어 목장에 들어갔다.


들어서자마자 산뜻한 귤향이 안면에 들이닥치는데 입을 벌리고 있으면 귤맛이 느껴질 정도...라고 하는 건 좀 심하지만 여튼 눈 앞의 세상에 귤향기가 넘친다. 하얀 강아지를 안고서 저기 서 있던 언니 한 분이 다가와서 사진 좀 찍어달라고 하신다. 바닥에 깔린 귤처럼 상큼함을 뿜뿜 내뿜으시길래 인중을 꾸겨가며 피사체에 몰입했다. 그녀가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서자마자 ㅅㅇㅈ이 내게 다가와 속삭인다. 이쁘다고 그렇게 혼자 실실대지 마. 이상해.

위미 동백 군락지에 왔다. 어느 집 마당에 동백나무 몇 그루가 서있다. 앞에서는 무인입장료를 받는다며 큼직한 돈통이 하나 놓여있는데 주인 아줌마가 지키고 서있다. 우린 동시에 "이게 군락이야?"라고 말했다. 나무 몇 그루가 어떻게 군락이고 저렇게 지키고 있는데 어떻게 무인입장료인지도 모르겠다. 카멜리아힐보다 좋다길래 설렜는데 굉장히 실망스럽다.


... 알고보니 동백군락지는 반대편이었다. 사실대로 말하면 ㅅㅇㅈ이 날 죽일 것 같으니 그냥 모른척 해야겠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형 차로 환승했다. 그런데 이 차는 다시 신천목장을 향한다. 아침 저녁으로 원없이 귤밭을 본다. 저녁에 가면 귤빛 하늘아래 귤빛 땅을 사진으로 담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해질 땐 땅이 안 보인다... 2016년엔 계획대로 결혼도, 졸업도 못 했는데 벌써 이렇게 해가 저문다. 열일곱살 때부터 기대하던 내 스물 여섯이 저문다.


김밥재료를 사들고 귀가하자마자 형이 이서진 마냥 발없이 김밥을 싸면 칼을 든 내가 냉큼 집어다 반은 잘라내고 반은 뭉개버린다. 뭉개진 건 당연히 내가 먹는다. 은박지로 예쁘게 포장한 김밥을 들고 한라산으로 황급히 떠난다. 이렇게 정신없이 보내는 12월 31일은 처음이다.


12319522.jpg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탐라유배일지] 돈 버는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