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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유배일지] 인생우동

116일차

by 태희킷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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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 14.


으슬으슬한 아침 기온에 양팔을 비비면서 일어났다. 얼굴엔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조용히 아침식사를 준비한다.


형이 일어나자마자 차를 타고 수우동으로 출발한다. 지난번엔 오전 11시에 점심 먹으러 갔다가 오후 3시까지 예약이 꽉 찬 걸 보고 충격받고 돌아왔는데, 오늘은 9시를 조금 넘겨 도착하니 11시 예약에 딱 한 테이블이 남아있다. 아주아주 대단한 집인듯하다.


한림 오일장에 들러 형이 집에서 입을 기모 몸뻬를 둘러볼 동안 나는 옆에서 핫도그 하나를 입에 물고 따라다닌다. 온 김에 양파 작은 망 하나도 사고 천혜향도 한 봉지 들고 왔다. 한림과 협재의 경계에 있는 카페에서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한 잔 삼키고 다시 수우동으로 간다. 나는 당연히 수요미식회에 나왔다는 대표메뉴 냉우동을 주문했다. 따뜻한 물을 따라온 컵을 양손으로 잡고 홀짝이고 있으니까 탱글탱글해 보이는 냉우동이 입장하신다.


자작하게 깔린 국물 탓에 하얀 면발이 그대로 드러난다. 길쭉한 오뎅과 반숙 달걀을 튀겨내 우동 위를 장식하고 있다. 다진 무를 젓가락으로 이리저리 퍼트리고 국물을 한 번 떠먹는다. 짭조름한 국물 속에서 끄집어 낸 매끈한 면발을 곧게 펼쳐 그대로 입안에 넣는다. 입술과 면발과 공기가 만들어내는 맛있는 소리가 테이블마다 가득하다. 입속에서도 냉기를 품고 있는 쫀쫀한 면발이 인상적이다. 맛있다. 맛있긴 한데...


조선의 치킨집을 반성하게 할 만큼 무지무지 큼직한 가라아게가 다섯 개나 올려져 있었던, 하얗고 조그맣고 특별해 보이기까지 하는 병에 담겨있던 쯔유를 하얀 면발 위에 뿌려 먹었던, 니혼의 그 우동에는 미치지 못해 많이 아쉬웠다.


브레이크 타임이 끝나던 늦은 6시, 나무로 된 미닫이문을 여니 심야식당을 떠올리게 하는 디귿자 테이블이 놓여있다. 우리가 가게 안으로 들어선 게 6시를 고작 5분, 10분 넘겼던 시간인데도 이미 세 명의 손님이 조용히 그리고 나란히 앉아있다. 손으로 메뉴를 짚어가며 주문을 마치고 나니 가게엔 빈의자가 더이상 없다. 위치 덕분에 음식이 나오기 전 분주한 주방을 그대로 볼 수 있었다. 갓 삶아낸 우동면을 차갑게 샤워시킨 뒤 손으로 길게 늘어뜨려 깊은 그릇에 결대로 말아놓고 있는 주방장의 눈썹이 신중해진다. 조용히 앉아있던 세 명의 손님은 우동그릇을 받아들고 입으로 소리를 내며 우동을 흡입 중이다.


나도 주문한 우동을 받아들고 경건하게 첫 젓가락질을 한다. 두 번째 젓가락질로 한 번 더 맛을 확인하고 나니깐 웃음이 나온다. 옆에서 ㅇㅈㅇ가 맛이 어떠냐고 물어왔지만 그냥 조용히 검지 손가락을 펼쳐 코앞에 가져다 댔다. 젓가락 위에서 면발을 두세 번 튕겨 안정된 자세를 잡은 뒤 입으로 넣을 때 입술과 면발에 공기가 더해져 증폭되는 흡입력 있는 소리가 이 공간을 가득 채운다. 10명 남짓한 손님들 모두 자신의 앞에 놓여있는 우동에만 집중하고 있는 이 공간에서 맛이 어떻다느니 이게 얼마냐느니 하는 이야기는 불필요한 소음이다. 한 번의 젓가락질에 딸려 올라오는 면 가닥이 줄어드는 걸 가슴 아파하면서 그릇을 싹싹 비운다.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오면서 주방 쪽을 향해 더듬더듬 이야기했다. "고치소사마데시타"

그게 니혼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용한 일본어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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