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일기] 가구 진열 알바

1월 4일 - 5일 (16만원)

by 태희킷이지

1월 4일 - 5일 (16만원)



고작 440원 인상된 최저시급과 함께 새해가 왔다. 수능도 끝났고 방학이기도 해서 알바에 굶주린 젊은이들이 많이 풀릴 시기라 별생각 없이 지원해놓고 잊고 있던 알바에서 아침 일찍 연락이 왔다. 원래 일정대로라면 어제부터 3일간 일을 하는 거였는데 혹시 4, 5일 이틀짜리도 구하시면 연락 달라고 문자를 남겨 놨었는데 오늘 당장 오라고 한다.가구 판매 알바라서 평소에는 거의 입을 일이 없는 청바지를 꺼내입고 나간다.


알려준 주소를 지도에 찍었더니 가구점이 아니라 병원이 나온다. 서귀포 시내 한복판에서 어디로 끌려갈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괜히 불안한 마음에 단톡방에 주소를 찍고 3시간 안에 답장이 없으면 구하러 오라고 부탁했다. 주소대로 도착한 병원(?)엔 새 간판이 달려있다. 이 곳이 병원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건 정문에 붙어있던 병원 이름 스티커를 떼어낸 자국 뿐이다. 새로 오픈을 준비하는 가구점이란다. 즉, 오늘 내가 할 일은 가구 판매가 아니라 가구 진열이라는 말이다. 짐 옮기기.


이렇게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3일 기준으로 뽑았던 알바에 공석이 났다는 사실과 아침 일찍 연락이 와서 조금 늦어도 좋으니 와달라고 했던 사실을 종합해보면 이건... 오늘 나의 알바 자리는 어제의 누군가가 도망친 자리가 분명하다.


오자마자 빨갛게 코팅된 장갑을 손에 쥐어준다. 누가 쓰던 것인지 축축한 걸 주길래 담당자가 안 볼 때 몰래 집어 던지고 바닥에 놓여있던 새 장갑을 손에 끼워 맞춘다. 깨끗한 새 가구들에서 나오는 아이러니한 먼지가 실내를 가득 채운다. 일을 시작한지 한 시간도 안됐는데 옷은 위 아래 할 것 없이 먼지를 가득 삼켰다.


일은 단순하다. 위치를 정해주면 가구를 옮기면 된다. 하지만 매장 안에 가구가 아직 다 들어오지는 않은 상태라서 어제 지하 창고에 들여놨다는 가구를 열심히 올려야 한다. 분해된 침대골조야 그리 무겁지 않은데 통으로 된 옷장이나 수납장을 옮길 땐 손가락이 휘어버릴 것 같다. 가끔 무거운 걸 들 때 팔목에 힘이 들어가면 팔꿈치까지 찌릿 하면서 손에 힘이 풀리곤 하는데 하필이면 옷장을 옮기는 도중에 힘이 풀려버려서 아찔했다. 알바를 계속하려면 병원에 한 번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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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근육이 적응을 끝냈는지 같은 가구를 들어도 어제만큼 힘들진 않다. 오늘은 실제로 가구도 덜 옮기고 있다.


온종일 하는 알바를 하루 해보고 나면 2일차엔 모든 게 더 잘 보인다. 누가 일을 더 하고(알바는 이게 곧 잘하는 것과 같지만...) 덜 하는지도 보이고 알바를 대하는 담당직원의 성향도 대충 나온다. 그래서 2일차엔 이 알바에서 내가 비집고 들어가야 할 내 자리를 자연스럽게 찾아들어가게 된다.


과거 내가 알바를 하면서 자주했던 실수 중 하나가 처음부터 지나친 의욕을 뿜어서 안 해도 될 일과 그에 따른 책임감을 함께 뒤집어 쓰는 것이었다. 한창 관계라는 단어가 머릿 속을 가득채웠던 때라 고용주의 반응과 현장의 분위기를 신경쓰는 게 항상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고, 잘 하는 알바라고 칭찬 받으면서 더러운 일만 더 하는 호구알바가 됐다. 물론 좋은 결과로... 예를 들면 잦은 단기 알바 기회가 주어지는 경우도 있겠지만 이젠 알바가서 일 잘한다는 걸 더이상 칭찬으로만 받아들이진 않는다.


오늘도 어김없이 새것들이 뿜어대는 먼지 덕분에 실내공기는 서울같다. 더 있으면 머리가 아플 것 같아서 자연스럽게 내 역할을 스스로 교체해본다. 그리 시급하진 않지만 해야 하는 일, 동시에 그리 어렵지 않으면서도 오래 걸리고, 일하는 티는 팍팍 나는 그런 일을 골라야 남은 시간을 편하게 보낼 수 있다. 알바가 다수인 현장에서는 이쪽저쪽 불려다니며 역할을 수시로 바꾸기 쉬운데 이런 롤을 선점해야 내가 원하는 시간동안 자리를 지키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다. 오늘은 날씨가 그렇게 춥지 않아서 먼지 속에서 헥헥대며 가구를 옮기고 조립하는 일을 할 필요는 없다. 바깥공기도 맡을 겸 가구 박스들에서 나오는 잔재들을 분리수거하러 밖으로 나왔다.


계속 공급되는 빈박스들 덕분에 나는 여유롭게 분리수거를 하고 있다. 폐지를 수거하시는 할아버지의 경운기 짐칸에 박스를 가지런히 쌓아올린다. 밖으로 나와있는 박스가 더이상 없을 때 할아버지는 담배를 한 대 물고 이야기를 시작하신다. 요즘 폐지 시세 얘기, 저기 지나가는 XX가 자신이 쌓아둔 폐지를 훔쳐간 XX라는 얘기... 차선 도색하는 커다란 차가 와서 경운기 좀 빼달라고 할 때까지 이야기를 하시던 할아버지는 경운기 짐칸을 뒤적이시더니 식혜 한 캔을 주시고 가셨다.


다시 돌아온 실내에선 가구배치가 한창이다. 기본 도면대로 배치를 하지만 곧 팀장이라는 사람이 등장하고 러그 하나의 위치부터 차근차근 고쳐나간다. 다른 현장직원들과 달리 짧은 치마를 입고 온 걸 보면 굳이 현장에 직접 손을 댈 사람은 아닌 것 같다. 그런 손이 많이 가는 존재의 등장은 담당자들을 긴장하게 하는 동시에 회피욕구를 불러일으킨다. 팀장을 전담마크 시킬 적당한 알바 셋을 물색할 차례다. 뭔가를 하고 있어야 할 순간이다. 중간에 빼올 수 없을만한 자리를 빠르게 찾아들어가야한다. 나는 블라인드를 잡았다. 1층과 2층 창문은 총 8개. 넉넉하게 1시간 반은 끄떡없다.


알바들을 보내야 하는 시간은 다가오는데 내일 당장 오픈할만한 상황은 아니다. 하나 둘 잡아서 내일까지 하라고 꼬시기 시작한다. 무거운 가구는 다 옮겨서 솔직히 꿀이라며 너스레를 떤다. 하지만 이틀간의 진행과정을 보니 지루하게 늘어질 게 뻔하다. 이제부터 하는 일은 뭘하든 알바의 눈에는 크게 티는 안나는 자잘자잘한 일이거나 청소다. 더 편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진행과정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시간이 무지무지 느리게 간다고 생각해서 내일은 거절한다.


아까 점심 먹고부터 알바 한 분이 안 보인다. 열 몇 살 많은 형이었는데 오지랖도 넓고, 말도 많으셔서 이쪽저쪽 돌아다니시면서 흥 넘치게 일을 하고 계셨다. 그러다 직원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는데 사장하고 말싸움이 붙어버렸단다. 그 형은 사장이 자신을 알바라고 무시했다며 근로계약서 쓰지 않은 걸로 고용노동부에 신고하고 본사에 전화를 걸었다. 직원 한 분은 황급하게 피시방에 가시더니 뜬금없는 햄버거 세트와 급조된 근로계약서를 함께 들고 나타셨다. 내용이 너무 허접스러워서 사인은 안 하고 대충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업무량의 증감 및 "갑"의 사정을 고려하는 경우 "을"은 이에 따르며, 업무의 성질 및 특성에 기하여 근무시간을 다르게 조정할 수 있으며, 조정에 의해 야간근로 발생 시 이에 따르는 것에 동의한다.


급여는 임금 산정의 편의를 위한 포괄임금제로써 일체의 연장,야간근로수당 및 사실상 계속 노무제공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주휴수당을 포함하여 지급함을 이해하고 동의한다.



10시-7시 라는 근무시간을 정해놓고도 이런 문구를 넣어놨다. 연장근무를 시켜도 안 할 거긴 하지만 연장근무를 해도 돈을 안받겠다는 내용에 사인을 하라는 건데 알바들 불러다 놓고 내용은 별 거 아니라고 요약하신다. 자신들이 겁나서 뒤늦게 부랴부랴 근로계약서를 쓰는 상황이라고 솔직히 말하는 게 덜 우스울 것 같다. 읽어보지도 않고 거침없이 사인들을 적어낸다. 내가 안 쓰고 있으니까 알바 한 분이 왜 안쓰냐고 물어보길래 저게 무슨 말인지 알려주고 퇴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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