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8일 (6만원)
2월 8일 (6만원)
유배가 마치고 륙지로 귀환했다. 동전 지갑에 있는 50원짜리 하나와 10원짜리 다섯 개가 남은 재산의 전부다. 1월 마지막 주부터 간절한 마음으로 열 다섯 군데에 알바를 지원했는데 이제껏 연락온 곳은 딱 두 곳 뿐이다.
출근 전부터 메시지가 스팸처럼 쏟아진다. 인원이 많이 필요한 알바라서 구인이 어려운지 다른 날, 다른 시간대의 알바도 있다면서 어서어서 지원하라고 권유한다. 굳이 집에 못 들어가면서까지 새벽에 끝나는 알바를 하고 싶진 않아서 거절했다. 사실 9, 10일에 진행하는 본 행사에도 알바를 지원했는데 탈락했다. 단정한 까만바지 입고 옷을 판매하는 건데 일당이 2만원이나 더 붙는다고 한다. 기껏 머리를 잘라도 결국엔 추운 날 짐나르게 생겨서 조금 속상하다.
12시에 시작하는 일이라 1호선 환승하면서 핫바라도 급하게 흡입했어야하는데 6호선엔 핫바를 파는 곳도 없다. 식대포함 일당으로 공고가 나와있길래 저녁 밥을 안 주는 건 예상했지만 6시도 아닌 8시까지 일을 시켜대면서 밥 먹을 시간을 안 주는 건 너무한 것 같다. 밥도 안 주고, 별도로 주는 식대도 없고, 심지어 밥 먹을 시간도 안 주는 이런 똥같은 알바를 하려고 륙지에 왔나 자괴감이 든다. 돈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 이딴 알바가 사라지려면 다같이 안 해야하는데 결국 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이런 똥같은 회사가 정신 못 차리고 계속 살아남는 것 같다. 구직 중 기피해야 할 블랙리스트에 올려야겠다. 알앤비 파트너스.
총 마흔 명이 넘는 인원이 알바를 하러 왔다. 체격부터 나이까지 다양한 남자들이다. 처음 함께 짐을 들게 된 아저씨는 친목형이다. "와 이거 무게가 좀 되네 어이구" 라는 자연스런 군소리로 입을 여시곤 박스를 툭 내려놓고 돌아서는 내 등 뒤에 대고 대뜸 어디사냐고 묻는다. 요런 분들은 하루종일 자신이 말을 걸 상대가 있어야 마음에 안정을 찾으시는 유형이라 일이 시작하기 무섭게 여기저기 말을 건네신다. 적당한 미소와 짧고 반사적인 수긍에 그쳐야만 피곤해지지 않는다. 대답을 길게 하거나 역으로 이야기를 건네다간 하루종일 그 분의 짝꿍이 되고 만다.
친목형 아저씨가 혼자 온 듯한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찔러보기를 시전하는 동안 서너 명끼리 무리짓는 사람들도 보인다. 친구형이거나 궁시렁형 중 하나인데 친구형은 말그대로 친구끼리 알바 온 유형이다. 그래서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그닥 관심도 없고 그저 친구와 함께 묶여 설렁설렁 일을 하는 것에 만족하거나 나보다 힘든 일을 하는 친구놈을 보고 놀려대며 낄낄대는 재미로 하루를 보낸다. 친구가 있으니 굳이 친목형처럼 주위 알바에 관심을 가질 일도 없어서 그저 '끝나고 어디갈래' 정도의 시덥잖은 얘기만 주구장창 나눈다.
친구형보다는 시끄러운 집단은 궁시렁형일 확률이 높다. 친구형에서 궁시렁형으로 발전하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의 궁시렁형 집단의 일원들은 처음 만난 사람들이다. 친목형의 사람들이 밑도 끝도 없는 사회성을 발휘해 대화의 물꼬를 트는 것과 달리 궁시렁형의 사람들은 보통 욕, 불평, 불만으로 대화를 채운다. 이에 동조하는 몇몇 사람이 모이면 궁시렁 패밀리가 완성된다. 그들의 대화는 알바에게 중요한 밥과 장갑, 마스크 그리고 업무 시스템에 대한 지적으로 구체화된다. 집단은 개인에게 용기를 가져다 주어서 궁시렁형의 몇 사람은 앞에서 얘기하는 담당자의 말에 슬쩍 태클을 걸기도 하고, 알바들을 모아 소심하게 선동하기도 한다. 그래도 내 관찰에 의하면 이런 궁시렁형의 사람들이 일은 가장 잘 한다. 대부분의 궁시렁형은 경험치가 꽤나 쌓인 경력자들인데 경험치가 없으면 다른 사람이 공감 할만한 불평, 불만을 이끌어내지도 못했을 것이 당연하다.
규모가 작은 일터에서는 쉽지 않겠지만 이정도의 대규모 인원이 동원되는 알바에서는 닌자형을 몇 명 찾아볼 수 있다. 이 분들은 쉬타임과 담배타임을 사용할 때 빼곤 도무지 보이질 않는다. 사람이 충분히 많으면 하나 둘 스스륵 빠져도 티가 안 나겠지만 닌자형의 알바들은 사람이 얼마 없는 상황에서도 수증기처럼 증발해버리고 만다.
트럭째 들어오는 박스들을 지시대로 위치시키고 나니 행사장에 입점하는 브랜드 담당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알바들은 일렬로 기차를 만들었고 행사장을 크게 한 바퀴 돌며 브랜드 별로 한 명씩 팔려간다. 나는 지방시 매장에 넘겨졌다. 여성복 행거 3개와 남성복 행거 1개 그리고 여성 슈즈와 악세사리 매대가 여럿 보인다. 겹치는 사이즈가 없도록 진열을 돕는 동시에 쏟아져나오는 종이상자를 해체한다. 옷과 상자들이 뿜어내는 먼지를 하루종일 들이마시고 있으려니 양쪽 코가 한 번에 막힌다. 공복을 12시간째 유지하고 있는 6만원짜리 알바는 66만원짜리 샤랄라한 옷들을 행거에 걸면서 여기 있는 40명의 알바비를 모아도 이 옷을 네 벌도 못 산다는 사실을 깨닫고 소름이 돋는다.
8시간 동안 단 한 번 뿐이었던 10분간의 쉬는 시간엔 대한민국 예비군의 모습이 눈 앞에 펼쳐진다. 호텔 여기저기에 철푸덕 앉아 손전화를 집어들고 뭔가에 집중한다. 뒤에 가서 슬쩍 보면 별 거 안 한다. 그냥 이것저것 눌러대다 결국 포켓몬이나 잡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