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5일 - 19일 (32만원)
2월 15일 - 19일 (32만원)
방학 때는 항상 알바 자리 하나 구하기가 힘들었지만 올해는 부지런히 지원서를 보내도 유난히 연락이 안 온다. 공고가 올라간지 한 두 시간도 안 되어 마감공고가 새로 뜨는 걸 보니 시작페이지를 알바몬으로 바꿔야 할 것 같다. 도서관 2층에서 아무 생각없이 F5버튼을 눌렀는데 17분 전 올라왔다는 공고가 눈에 보인다. 코엑스 베이비페어에 어린이 카시트를 판매하는 일이란다. 이후로 베이비페어에 들어오는 여러 업체에서 모집공고가 올라오기 시작한다. 어린이 베개도 팔고, 이유식도 판다고 한다. 이 때다 싶어 3개를 골라 지원서를 제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왔다. 혹시나 도서관 밖으로 나가는 동안 전화가 끊길까봐 책장 뒤에 쪼그려 앉아 전화를 받는다. 처음 지원했던 카시트 회사다. 일당은 7만원이고 사전 교육을 3시간 받는데 교육일은 3만원이 나간다고 한다. 목, 금, 토, 일에 수요일 교육까지 포함하면 한 번에 31만원을 쥘 수 있다. 꾸엑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도서관이라서 침착하고 담담한 목소리로 내일 뵙겠다고 말씀드렸다.
박람회장을 들어가보니 아직 정돈되지 않은 부스들이 여럿보인다. 사다리를 발처럼 사용하는 아저씨들은 사다리째로 이동해가며 타카질을 하신다. 박스에서 갓 나온 전시품들의 새 냄새가 퍼진다. 이리저리 움직이는 크고 작은 초록색 손수레를 피해가면서 고용주의 부스에 도착했다. 박람회 목걸이를 하나와 교육자료를 넘겨주신다. 카시트의 개념에 대해 알아보고 이 브랜드의 차별성에 대해 배웠다. 배운 게 아까우니까 요약하자면 카시트는 차량용 안전벨트가 아이에 몸에 맞을 때까지 사용하는 것을 권장하며 신생아부터 사용할 수 있는 신생아 카시트부터 3, 4세부터 사용가능한 쥬니어 카시트까지 있다. 그 사이에는 보통 9개월부터 7세까지 사용하는 토들러 카시트가 있다. 이 브랜드는 안전성을 강조하는 편이라 경쟁사의 제품과 비교한 안전성 테스트를 홍보영상을 통해 공개하고 있다.
알바는 네 명인데 대부분이 이전 박람회에 참여했던 분들이라 경험자라고 한다. 카시트에 대해 배우고 고객들이 자주 묻는 예상질문에 대처하는 연습을 조금 하다보니 금세 두 시간이 지났고 내일 보자며 보내신다. 뭔가를 배우고 나니까 정확하게 설명해서 잘 팔고 싶은 의욕이 생긴다. 팀장님 한 분이 뭐 팔아봤느냐고 묻는다.
"딸기요."
"딸기보다 팔기 쉬워. 너가 상대보다 많이 알고 있다는 것만 알랴주면 돼.
일단 잘 설명해서 카시트에 앉히고 애기가 웃으면 게임 끝이야."
그 말을 들으니까 옛날 생각이 난다. 딸기를 팔 땐 내가 그 딸기를 먹어보지도 못했고 그 딸기가 다른 딸기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몰라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한정적이다. 그저 딸기가 두 팩에 오천 원이라는 가격정보만 반복적으로 이야기할 뿐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이 딸기가 어떤 맛인지, 어떻게 해먹으면 맛있는지, 왜 지금 딸기를 먹어야하는지를 이야기했으면 내가 두 팩보다는 더 팔았을 것 같다.
아침에 집을 나오는데 일요일까지 휴가라는 형이 신발을 신는다. 어디가냐길래 코엑스간다고 했더니 눈동자가 커진다. 경쟁사의 알바가 우리집에 살고 있었다. 출근길을 함께한 경쟁사의 알바와 베페목걸이를 걸고 줄지어 서있는 엄마아빠들을 제쳐 당당히 입장한다. 완공이 아직 먼 공사현장 같았던 박람회장이 깔끔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옆부스에서는 조기축구 아저씨들처럼 손바닥을 모아서 화이팅을 외치길래 우리도 하려나 싶어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첫날에는 온종일 서있다보니 다리가 아팠는데 그 고통은 목이 너무 아파서 점차 잊힌다. 노래 하기 싫은데도 노래를 하지 않으면 탈출할 수 없는 방에 갇혀있는 느낌이다. 틈틈이 물을 들이켰지만 나중에는 목소리가 갈라지고 혀가 꼬여서 진지하게 내 설명을 듣던 아버님, 어머님들이 피식 웃으신다. 정해진 부스 안에서 살짝살짝 걸어다니는 것 빼곤 운동량이 전혀 없지만 온종일 서서 적극적으로 떠들다보니 점심에 먹은 뱃속의 도시락이 금세 증발한다.
제품에 대한 스펙을 완벽하게, 빠짐없이 설명하면 손님이 알아서 판단하고 사는 건줄 알았는데 몇 마디만 나눠봐도 이 사람이 더이상 정보를 원하지 않는 게 티가 난다. 이미 설명이 듣기 싫은 사람은 몸이 자연스레 돌아가있거나 눈동자에 영혼이 없다. 결국 내가 하는 얘기에 관심이 없는 이런 사람들한테 구매욕구를 심어주어야 훌륭한 판매원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그렇게 하기가 무척 어렵다. 그럴땐 제품의 장점만 와다다다 쏟아내던 입을 닫고 하나씩 물어본다. 아이가 몇 개월인지, 몇 살까지 태울 카시트를 찾으시는지, 타사 제품과 어떤 면에서 차이가 있어서 고민을 하시는지. 대본같은 내 얘기를 줄이고 질문을 해보면 바짝 끌어올렸던 방패를 조금 낮추는 경우도 있다.
아무래도 아이가 사용할 물건이다보니 아이들을 직접 앉혀보고 아이가 편안하다고 느끼면 구매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특장점을 강조하다보니 설명할 때 어쩔 수 없이 타사와 비교를 조금씩 하게 되는데 아예 대놓고 "OO랑 비교해서 뭐가 장점이에요?" 라고 물어보시는 분들도 있다. 그런 걸 보면 분명한 장점으로 내세울 게 없다면 시장에서 도태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경쟁을 통해 아이를 위한 안정성과 부모님을 위한 편의성을 동시에 강화할 수 있다면 부모님들이 고민하는 시간이 짧아지는 바람직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겠다.
진상고객은 그닥 없었지만 사은품 하나에 목을 매는 분들이 너무 많아서 피곤했던 건 사실이다. 알바가 무슨 힘이 있겠느냐고 솔직히 말씀드렸지만 찡찡거리면 원래 하던 박람회 할인도 안 했으면 하는 마음이 치밀어 오른다. 평일부터 주말까지 이어진 박람회라서 몇 번씩 찾아오시는 분들도 많았다. 처음에는 한 분이 오셨다가 주말에는 두 분이 함께 오시는 경우도 있었다. 함께 오신 분들은 요목조목 따져봐서 상의 후에 결정하시지만 혼자 오신 분들은 부지런히 통화를 하신다. 근데 혼자서 방문한 아빠들은 엄마한테 허락을 받고 혼자서 방문한 엄마들은 아빠한테 통보를 하신다.ㄲㄲㄲ
마지막 날까지 깔끔했던 알바였다. 베페 입점 알바 중 우리 퇴근시간이 가장 빨랐던 것 같다. 마지막 날 조차 뒷정리는 없었다. 계약된 금액보다 만원을 더 얹어 약속된 날짜에 입금해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