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 17일 (하루 6시간 / 주급 378,000원)
3월 1일 - 17일 (하루 6시간 / 주급 378,000원)
더불어민주당에서 대선을 앞두고 후보를 결정하기 위한 국민경선을 준비하고 있다. 신청한 사람은 모두 경선 투표에 참여할 수 있는 선거인단이 될 수 있는데 그 신청 전화를 받는 전화상담원 알바에 지원했다. 3시 - 9시 라는 애매한 근무시간과 밥을 안 준다는 충격적인 사실 때문에 조금 속상하긴 했지만 주휴수당과 휴일근무 1.5배 조건때문에 계약서에 이름을 가지런히 그려넣었다.
자리에 앉아 콜센터 프로그램을 열었다. 출근 시간 역할을 하는 로그인 시간이 자동으로 기록된다. 전화받기 버튼을 누르기 무섭게 첫 통화가 시작된다. 매뉴얼을 낭독해 개인정보를 확인하고 투표접수를 시작한다. 헤드셋 속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을 혹여 놓칠까 한쪽 귀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받고 끊고 받고 끊고를 반복하다보니 창밖 빌딩사이를 애써 비집고 들어오던 햇빛은 퇴근한지 오래다. 사실 지난 번에 했던 전화 알바가 그리 좋은 기억도 아니고 콜센터의 악명은 익히 들어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전화 걸기 알바가 아니라 전화 받기 알바라는 사실 하나가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이틀간은 전화량이 많아서 화장실 다녀오는 시간 빼곤 따로 한 눈 팔 시간이 없었는데 오늘부턴 조금 여유가 생겨 파티션 너머 사람들을 관찰해본다. 안그래도 어제 퇴근할 때 알바를 더 뽑을 거라고 공지를 하더니 확실히 1인당 할당 전화량이 줄어든 것 같다. 다들 나름대로 통화 사이사이의 시간을 알차게 보내고 있는 듯하다. 손전화 게임을 하는 사람도 있고 콜센터 프로그램 옆으로 인터넷 창을 띄워 봄옷을 구경하는 사람들도 있다. 밥 시간이 되니 몇몇은 가방에서 도시락을 꺼내 먹고 몇몇은 옆 건물의 편의점으로 향한다. 나는 건물 로비에 있는 쇼파에 편안히 앉아 경비아저씨 눈치를 보면서 고구마를 퍼먹는 속도를 높인다.
모자를 쓰거나 후드를 뒤집어 쓴 사람이 여럿 보인다. 모자를 쓰면 헤드셋을 머리에 바로 대는 것보다 편하고, 후드를 뒤집어 쓴채로 헤드셋을 귀에 대면 통화가 아니라 웅변을 하시는 분들의 깜짝 공격에 대비할 수 있어서 준비를 한 것 같다. 아 그냥 머리를 안 감았을 수도 있겠다. 처음엔 여기저기서 웅성웅성 통화하는 소리가 무척이나 거슬렸는데 계속 듣고 앉아있으려니 금방 적응이 된다. 백색소음으로 가득찬 이곳에서 몇 달째 목차만 읽고 묵혀두던 책을 3권이나 해치웠다. 다만 소설을 읽다가는 훅 들어오는 벨소리에 흐름이 끊길 수 있어 주의해야 한다. 밀렸던 웹툰까지 다 보고 나면 아 이런 꿀같은 알바가 있나 싶어 뿌듯함이 식전 위액마냥 올라온다.
수화기 너머로 꼬장을 부리는 사람은 생각보다 별로 없었다. 다만 제각각인 통화품질과 부정확한 발음 탓에 질문을 반복하면 '야 너 귀가 잘 안들리냐?'고 묻는 분은 있었고, 나는 잘 들리는데 너는 왜 안 들리냐고 역정을 내시는 분은 있었다. 침착하게 규정을 안내하면 응 다 알아듣겠는데 다시 전화하기 싫으니까 나는 일단 해달라고 떼를 쓰는 분은 있었고, 휴대폰 인증 도중 내 휴대폰이 왜 내 명의가 아니냐(?)는 황당한 질문을 주시는 분은 있었다. 경선참여를 원하는 분들만 신청하시면 된다고 말씀드려도 왜 니네가 전화 안 걸고 내가 전화를 걸어야 하냐고 큰 소리 치는 분은 있었고, 왜 여자가 안 받고 남자가 받느냐고 뚝 끊으시는 분은 있었다. 음 좀 있었구나.
거칠게 윽박지르는 아재들한테 한바탕 혼나고 나면 심장은 빠르게 뛰고 주먹엔 힘이 들어간다. 이럴거면 불친절의 죄책감 좀 덜 수 있게 전화를 받자마자 처음부터 나에게 욕을 했으면 좋겠다는 호전적인 생각을 하다가... 이제껏 나의 통화예절을 돌이켜본다. 얼굴도 모르는 전화 너머 상대에게 시비를 걸고 트집을 잡아 참 많이 싸움질을 했던 것 같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자, 알바라는 진리를 조금 더 일찍 깨달았다면 이해 못 할 것도 없는 것들인데 수화기에 대고 왜 그렇게 많은 화를 쏟아냈는지 모르겠다. 보이지도 않는 상대에게 미소도 짓고 손까지 써가면서 친절하게 통화하고 있는 옆에 언니만큼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불친절하진 않도록 노력해야겠다.
짜증이 잔뜩 묻어나오는 알바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런 목소리는 유난스럽게도 확확 튀어서 통화를 하고 있는 헤드셋도 통과해 귀에 들어온다. 나를 포함한 몇몇 사람들은 의자에서 엉덩이를 살짝 띄워 짜증의 진원지를 바라본다. "저기요. 표준어로 똑.바.로. 말씀해주세요!!" 저분은 아무래도... 똥같은 전화를 많이 받으셔서인지 이성의 끈이 끊어진 것 같다. 같은 의미의 말도 선택하는 단어나 어투에 따라 듣는 사람에겐 굉장히 달라진다는 걸 여기서 한 번 더 배운다.
세심하고 예쁜 말만 하면 세상이 참 아름답겠지만 같은 설명과 멘트를 반복하다보니 가르치려들거나 무시하는 말을 하는 실수를 하게 된다.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닌데 주소지를 물어보더니 광주광역시는 전남이 아니라면서 쓸데없이 따박따박 싸우는 사람도 있다. 경기도 광주도 있으니까 그렇게 말씀해주시는 걸텐데. 전화 주시는 어르신 중엔 통화 중에 문자메시지를 확인 못하시는 분들이 꽤 있는데 그래서인지 여기저기서 한숨 소리가 들린다. '나는 이렇게 잘 아는데 당신은 왜 몰라! 참 답답하네.'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반복 알바가 이렇게나 위험합니다아.
오늘 옆에 앉으신 분은 엄청 웃기다. 들어서는 혼동되기 쉬운 발음이 있으면 단어를 사용해 되묻는 경우가 있는데 예를들어 의자할 때 '의'요? 라는 식이다. '의'라는 흔치 않은 단어가 많이 등장하는 것도 신기한데 오늘 옆에 앉은 분은 '의'를 되물을 때마다 자꾸 "네. 선생님. 의자왕할 때 '의'요?" 라고 물어봐서 혼자 낄낄대고 웃다가 침을 흘렸다. 콜센터 알바에겐 풍부한 어휘력이 필수적이다.
친절하고 매끄럽게 선거인단 접수를 마쳤다고 생각하며 전화를 끊으려는데 꼭 마지막에 내 이름을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다. 이름을 물어보면 난 잘못한 게 없는데도 괜히 불안해져서 쪼그라드는 느낌이다. 나중에 내 이름대면서 해코지할까봐 겁나니까 제발 이름은 안 물어봤으면 좋겠다.
틈틈이 물을 크게 한 병씩 떠다 마시지만 쉬지않고 떠들다보니 목소리가 좀 갈라진다. 유난히도 속삭이듯 이야기하던 콜센터 직원들이 잘 안 들리라고 소곤거리는 게 아니라 자신의 목을 보호하려고 그랬다는 걸 깨닫곤 살짝 콧물이 나오려고 한다. 훌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