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5일 (4만 7천 원)
4월 25일 (4만 7천 원)
청담역 부근 호텔로 건강토크쇼 알바를 갔다. 갱년기 여성에게 필요한 건강기능식품을 홍보하는 행사인데 4시간 정도 되는 짧은 행사라 준비부터 철수까지 하루에 다 끝내는 일정이다. 일당이 오만 원도 안 되지만 조기퇴근을 기대하며 회전문으로 들어선다.
대행사 직원들과 다마스에서 짐을 하나씩 내리고 있다. 테이블, 의자 같은 건 다 호텔 것을 사용해서 그런지 생각보다 짐이 얼마 안 된다. 배너 몇 개를 세워두고 여기저기 불려다니며 심부름을 하다보니 금방 점심 때가 된다. 따로 나가서 먹을 시간이 안돼서 직원 한 분이 김밥을 양손 가득 사오셨다. 많이 사왔다길래 참치김밥 한 줄에 치즈김밥 두 줄을 먹었는데도 더 먹으라고 권하셔서 무척 땀이 났다.
밥을 먹는 중에 첫째아이가 고1이 됐을 것 같은 (아마도) 대장 아저씨가 알바들에게 전공과 진로에 관해 묻는다. 다행히 내가 첫번째 순서는 아니어서 대답을 생각할 시간은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다른 알바 두 분의 얘기에 집중하느라 금방 내 차례가 됐다. 예전에는 어른 맞춤형 거짓말도 잘 했는데 이젠 그것도 귀찮아서 잘 모르겠다고 하고 말았다.
사전 신청을 하고 건강토크쇼에 오신 아주머니들이 빈 자리를 하나 둘 채워주신다. 토크쇼를 진행하는 중간중간 연회장 안에서는 부스 이벤트도 진행되는데 참여하고 도장 네 개를 모아오면 건강기능식품 한 달 분을 공짜로 지급한다. 이 행사의 핵심은 사실상 이벤트가 전부라서 참여하시는 아주머니들의 열기가 뜨겁다.
그 중 하나는 인스타그램 이벤트였다. 제작된 판넬을 들고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제시된 해시태그를 달아 업로드하는 이벤트인데 갱년기 여성을 위한 건강기능식품을 받으러 오신 분들 중 인스타그램을 하시는 분이 과연 얼마나 될지 의문스럽다. 토크쇼에 입장하는 아주머니들께 주차도장을 찍어주던 나도 이벤트 부스를 도와주러왔다. 인스타 이벤트는 예상대로 험난해보인다. 처음에는 카카오스토리에라도 올려달라고 침착하게 설명하던 직원도 이젠 지쳤는지 알바들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인다. "판넬들고 사진 찍으시면 그냥 도장 찍어주세요."
토크쇼 2부에는 김미경 아줌마가 강연을 하러 오셨다. 예전에 티비에서 봤던 모습보다 살이 더 빠진 듯하다. 호텔에 들어올 때부터 몹시 피곤해보이고 표정도 매우 안좋아서 무섭기까지 했는데 무대에 올라가자마자 에너지 넘치는 목소리로 강연을 시작한다. 역시 프로답다. 사전신청하신 분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있는 종이를 들여다보고 있다. 지금 강연을 듣고 계신 분들은 이름 옆에 서명을 하고 들어가신 분들인데 신청해놓고 안 오신 분들이 너무 많아서인지 대행사 직원 분의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인다.
통화 무제한 요금제냐고 묻길래 아니라고 하자 까만색 아이폰 파이브를 건네 주신다. 안 오신 분들한테 지금 오시면 강연 들으실 수 있으니 오시라고 전화를 돌려달란다. 하지만 그들은 다같이 안 오기로 마음을 먹으셨는지 전화를 받지 않으신다. 내가 사람 목소리는 못 듣고 한결같은 통화연결음만 들고 있는 걸 알아챘는지 직원의 표정이 더 우울해진다. 이따 행사 다 끝나고 "누구세요? 전화하셔서요." 라는 피곤한 전화 받느라 고생 좀 하시겠다.
참석자들이 받아갈 선물(갱년기 여성을 위한 건강기능식품)을 준비하고 있는데 건너편 연회장에서 갑자기 신나는 음악이 나온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문앞을 기웃댄다. 한동안 몰려든 사람들로 웅성대더니 '걸그룹' 이라는 단어들려와 나도 정신이 번쩍든다. 손으로는 계속 일을 하고 있는데 힐끔힐끔 저쪽을 자꾸 보게된다. 진짜 걸그룹!!! 머리색을 한 여자 다섯 분이 나왔다. 실장님 같은 분이 점심은 먹고 싶은 거 먹으라고 하니까 다같이 환호성을 지른다.
역시 행사알바에 빠지면 섭섭한 진상 구경도 제대로 했다. 토크쇼에 참여하는 대가로 선물이 나가는 거니까 끝날 때 받아가는 건데 선하게 생기신 아저씨 한 분이 급한 일이 생기셨다며 급히 주차도장과 선물을 받아가고 싶다고 하신다. 이벤트 부스에서 받아오신 도장을 확인하고 의심없이 4주 분을 봉투에 넣어 드렸더니 거듭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사라진다. 행사가 끝나고 사람들이 우르르 나온다. 화를 잔뜩 품으신 아주머니 한 분이 저돌적으로 다가오시더니 아까 우리 남편이 받은 도장을 왜 뺏어가냐며 소리를 지르신다. 선물을 받으려고 손부터 내미는 사람들 사이에서 안그래도 정신이 없는데 뭔 소린가 싶다.
아주머니 옆에는 낯익은 아저씨가 서있다. 아까 말한 급한 일은 선물을 주차장에 있는 차에 안전하게 실어 놓는 일이었는지 빈손이다. 아저씨는 소리를 질러대는 아내 옆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나를 처음 보는 척하신다. 나도 갱년기 핑계대고 욕 한 번 할 걸 그랬다. 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