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일기] 뷰티풀 민트 라이프

5월 13일 - 14일 (12만 5천 7백원)

by 태희킷이지

5월 13일 - 14일 (12만 5천 7백원)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쯤부터 오른쪽 귀에서 소리가 났다. 병원에선 청력은 여전히 튼튼하다고 했지만 무서워서 엠피쓰리를 서랍 속에 넣었다. 대신 학교에 갔다 집에 오면 잘 때까지 방 안에 라디오를 켜놨다. 12시부터 시작되는 라디오 신청곡들 중엔 최대음량으로 들어도 귀에 전혀 무리가 갈 것 같지 않은 조용한 음악이 종종 등장했는데 그럴 때마다 집중해서 듣다가 가수 이름을 한 곳에 적어두었다. 하루는 소규모아카시아밴드 노래가 나왔고 그 밴드가 나왔던 EBS 스페이스 공감 방송까지 찾아보며 노래를 들었다.


밴드는 그해부터 시작된 그랜드 민트 페스티벌 라인업에도 이름을 올렸고 대학에 가면 꼭 공연을 보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GMF는 꽤나 성공적인 3년을 보냈는지 내가 스무 살이 된 해부터 뷰티풀 민트 라이프라는 이름의 봄 버전 페스티벌을 열기 시작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예매창을 켰고 GMF 대신 크라잉넛 15주년 콘서트에 갔다. 3시간 가까이 소리를 지르다 나오면서 이 티켓에 2배나 되는 돈을 주고 GMF에 갔으면 후회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안 가도 GMF는 계속 잘 됐고 티켓가격도 계속 올랐다.


봄이든, 가을이든 후회를 하더라도 한 번쯤 가봤어야하는데 바보같이 미련만 계속 품고 있는 나에게 ㅇㅂ가 알바를 자리를 물어다줬다. 물어보자마자 무조건 하겠다고 했다. 10년간 미뤄 온 페스티벌에 간다는 설렘은 좋았지만 이제는 라인업을 봐도 이름을 들어 본 가수가 몇 명 없다는 게 조금 아쉽다 . 역시 하고 싶은 건 하고 싶을 때 해야 한다.


뷰민라는 원래 고양시에서 했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몇년 전부터는 GMF처럼 올림픽공원에서 하고 있다. 조금 일찍 도착해 페스티벌 현장을 둘러본다. 88마당을 중심으로 높게 펜스가 쳐있고 반디나로 머리를 묶어 올린 언니들이 티켓부스 앞에 옹기종기 모여있다. 주말이라 공원을 산책하는 사람들도 많아서 오후가 되면 정신없을 것 같다.


담당자 분께 목걸이를 받고 들어가 팔찌를 찬다. 이틀짜리라서 그냥 종이가 아니라 코팅 팔찌다. 알바들은 무대 옆 텐트에서 주황색 바람막이를 받아 입고 경호팀을 따라 각자의 구역으로 팔려간다. 나는 세 개의 스테이지 중 하나뿐이었던 실내공연장에 배정되었다. 편한 좌석이 마련되어 있어서 공연장으로 들어가는 관객들에겐 좋겠지만 로비에 남겨진 나에겐 건물 밖 야외 스테이지의 노래도, 완벽한 방음시설을 탑재한 공연장 안의 노래도 들리는 않는 최악의 장소다.


나는 입구에서 입장하는 사람들의 음식 뺏는 일을 했다. 푸드트럭에서 음식을 실컷 팔아놓고 여긴 실내공연장이라고 뺏는 것도, 규정이라고 양해 부탁드린다고 고개 숙이며 몇 번씩 말해도 들은 척도 안 하는 닝겐들을 상대하는 것도 가슴 아프지만 눈 앞에 음식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너무 괴롭다. 한 시간 정도 서있었는데 경호팀장 아재가 오더니 3교대였던 내 근무를 말뚝으로 바꾼다. 선한 미소로 의자 하나를 건네 주면서 앉아서 편하게 하라며 나의 동의는 구하지 않고 말뚝을 세운다. 짧은 쉬는 시간마다 부지런히 다른 스테이지를 찾아가 공연을 볼 건 아니어서 그냥 앉아있었다.


부족한 인원 때문에 말뚝 세워놨으면 괜히 건드리진 말아야 하는데 이 아재는 가끔 등장해서 '앉아서 뭐하는 거야. 앉았으면 일 제대로 하라고.' 이렇게 씨부리고 간다. 내가 먼저 앉아 있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지가 앉혀놓고 나한테 왜이러나 싶어서 세 번째 와서 씨부릴 땐 살의를 담은 눈으로 쳐다보니까 그제야 꺼져주신다. 첫 날 퇴근하면서 담당자 분께 깊은 빡침을 이야기했더니 미안하다며 내일은 바꿔주겠다고 하신다.


둘째 날은 원래대로 나를 포함해 3명이 배정됐고 1시간 근무, 30분 휴식으로 3교대를 돌렸다. 그와중에 어제 그 아재가 오더니 어제 말뚝이 힘들었냐고 묻는다. 어제 한 소리 들었나보다. 아무래도 말뚝보단 교대가 나을 것 같다고 말했더니 "알았어. 니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라며 비꼬더니 사라진다. 간만에 만난 저 신인류에게 어떤 빅엿을 선사할까 가슴 두근두근하고 있었는데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함께 씹어줘서 안정을 되찾았다.


첫 날에는 비를 동반한 돌풍이 불어서 배너와 현수막 몇 개도 날아가고 잔디광장에도 물이 참방참방 거렸지만 둘째 날엔 어제 1일권 끊은 사람들이 심하게 억울할 정도로 날씨가 쨍쨍했다. 쉬는 시간마다 휴게 텐트에 가는 길, 잔디위에 몸뚱이를 널어 여유라는 추상어를 표현하고 있는 닝겐들을 보고 '아 돈이 들더라도 이런 데엔 놀러와야 하는구나'하는 생각을 해봤다. 메인 무대 뒤에 있는 나무에 기대 음악을 들으면서 도시락을 까먹고 있다. 아마 저녁도 돈까스 도련님일 것 같아 조금 속상하지만 생각보다 음악이 잘 들려서 위로가 된다. 무대 뒷편이지만 틈사이로 뮤지션 뒷모습과 스탠딩 존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보인다. 같은 시간에 같은 음악을 듣고 있지만 무대를 사이로 나뉜 두 공간의 공기는 참 다른 것 같다.


잔디 위에 몸을 널고 싶었던 사람이 주위에도 꽤 많았는지 아는 사람도 서너 명 만났다. 실내공연장은 정원이 정해져있어서 옥상달빛 공연을 할 땐 순식간에 사람이 꽉 찼다. 이제 나가시면 재입장이 안 된다고 안내하는 그 순간에 잠깐 커피를 사러 갔다가 못 들어오는 남자가 하나 있었다. 억울함을 토해내면서 자기는 그런 안내를 못 받았다고 소리 치는데 경호원들은 얄쨜없이 안 된다고 반복하고 있다. 그 모습을 구경하다가 그 남자랑 눈이 잠깐 마주쳤는데 이제 나한테 와서 애원한다. 답답한 마음에 목소리를 낮추고 얘기해줬다. '억울하신 것도 화가 나신 것도 알겠는데 전략을 잘 못 잡으신 것 같아요. 정문에서 그렇게 소리 지르시면... 보세요. 지금 줄 서 계신 분들 다 관객분만 보고 있어서 저희가 살짝 들여보내드릴 수도 없어요.' 납득하신 듯 하다.


알바가 끝나면 남은 공연을 보고 갈 수 있었지만 첫 날엔 너무 추워서 집에 왔다. 오늘도 그냥 가면 조금 아쉬울 것 같아 수변무대에 가서 랄라스윗 무대만 보고 나왔다. '아 돈이 들더라도 이런 데엔 (같이) 놀러와야 하는구나'하는 생각을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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