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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유배일지] 첫 이사

3일차

by 태희킷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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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9. 23.


오름을 보러 왔다. 9시 반을 넘겨 도착했는데 좀 더 아침 냄새가 날 때 왔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사장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축축한 숲길을 천천히 걷는다. 양옆에 빽빽히 서있는 나무 사이로 살짝 볕이 드는데 숲속을 계속 보고 있으면 엘프가 나올 것만 같다. 들고간 사진기는 몇 번 꺼내보지도 않고 열심히 나무들만 들여다보게 된다.


게하로 돌아와 커피 한 잔하면서 마음을 굳혔다. '조용하다 못해 적막함이 느껴져 제가 생각하던 분위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라고 말씀드리긴 했으나 이곳에서 지내던 스탭들과 사장님과의 관계가 그리 좋아보이진 않았던 게 가장 마음에 걸렸다. 죄송하고 민망한 마음을 두고 짐을 얼른 챙겨 나왔다. 버스를 기다리며 커피를 또 한 잔 마셨다. 버스비를 제외하면 유배지에 도착한 이후 역사적인 첫 지출이다.


첫 날의 기억을 떠올리면 아직도 등뒤가 서늘해서 (절대 그럴리 없지만) 며칠새 더 불어난 것만 같은 이 짐들을 끌고 버스를 탈 생각에 괴로웠으나 제주에 출장오신 ㅇㅅㅇ형의 은혜로 서귀포까지 차를 얻어탔다. 꺄오. 2년 전에 네파 등산 알바할 때 만나곤 연락만 종종 주고받았지 만나질 못했었는데 탐라국에서 보니 더욱 더 반가웠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1시간 만에 서귀포로 왔다. 바다를 코 앞에 둔 게스트 하우스의 위치를 확인하고 칼국수를 후딱 한 그릇 비웠다. 월욜에 다시 이 동네에 들르신다니 그땐 내가 꼭 밥을 사야겠다.


월요일부터 일을 시작하기로 했다. 2일 근무, 2일 휴무 2교대로 진행된다. 휴무때도 그닥 나돌아다닐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쉬는 날이 생겨서 기분이 좋다. 곧 가시는 스탭분이 있다고 그리고 뉴페이스도 왔다고 오늘 저녁은 외식이란다. 메뉴에 생선이 걸릴까봐 조마조마했으나 다행히 갈비를 먹으러 갔다.


다들 잠깐 담배를 피우러 나가서 갈비집엔 게하사장님 아들과 나만 남았다. 내 앉은 키만한 6세의 이 미취학아동과 공유할 수 있는 화제가 도무지 없어서 터닝메카드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흠 나는 더 조심스러웠어야 한다. 내 눈을 바라보는 미취학아동의 눈은 어느 때보다 뜨겁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황파악을 마친 나는 비겁하게도 말을 돌렸고, 터닝메카드W를 아느냐는 질문에도 전혀 모른다고 발뺌했지만 '터닝메카드'라는 한 마디에 이미 마음을 활짝 열어버린 이 미취학아동 앞에 놓여진 나는 아주 위험한 상태였다.


까만바다가 보이는 게하 옥상에서 맥주 한 캔을 마시고 내려왔다. 팔을 베고 오른쪽으로 돌려누웠는데도, 술을 마셨는데도 잠이 잘 안 온다. 아마 낮밤을 다시 바꾸는 과정이라 몸이 힘든가 보다. 오션뷰는 아니지만 조용히 있으면 규칙적인 파도소리가 점점 방안을 채운다. 아마 비슷한 리듬으로 잠이 들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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