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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유배일지] 뒹굴뒹굴

12일차

by 태희킷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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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0. 2.


밤새 묶어놨던 머리를 푸니까 얼굴에 하루 묵은 삼푸향이 훅 들어온다. 잠이 덜 깨서 평상에 멍하니 앉아있는데 게스트 하우스랑 마주 보고 있는 카페 테라스엔 흰 머리 외국 아재가 맥북 켜놓고 앉아있다. 매일매일 (비가 많이 오는 날에도) 꼭 저 자리에 앉아있는데 뭘 하시는 건지 무척 궁금해서 슬그머니 뒤로 잠입해 모니터를 훔쳐보고 싶다. 아침부터 부지런하신 아재를 보고 있다보니 젊은 나도 뭔가 해야 할 것 같아서 옥상에 올라가 책을 읽었다. 하늘엔 회색구름이 장기투숙 중이라서 오전에도 그리 덥지 않고 빛과 바람은 적당해서 책 읽기 좋은 환경이다.


점심 먹고 스포츠 하이라이트를 몰아서 보면서 뒹굴대니까 어느덧 세 시가 넘어간다. 비가 올 듯 말 듯 불안한 날씨지만 내리면 쿨하게 버스 타고 올 생각으로 쇠소깍으로 출발했다. 랜덤으로 듣다가 나온 박지윤의 <환상>이 넘나 슬퍼서 한 곡 반복으로 들으면서 계속 걸었다. 걷는 도중에 비가 살짝 왔지만 맞을만해서 고개를 푹 숙이고 그대로 걸었다. 생각해보니까 지난 번에 미취학아동을 모시고 쇠소깍 갔던 날도 일요일이었는데 벌써 한 주가 지났다. 일욜에 성당은 안 가고 쇠소깍에만 꾸준히 가고 있는 나의 신앙은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다.


지난 번에 왔을 때보다 날씨가 좋지 않아서인지 연휴치고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해변에 내려가진 않았지만 더 걷고 싶어서 부두 끝까지 걷는다. 등대 주변으로 가는 길은 좀 높아서 어릴적 육교를 건널 때처럼 심장이 괜히 쫄깃해졌다. 테트라포드 위에서 낚시를 하시는 난닝구 아저씨의 아찔한 뒤태를 감상하고 있는데 전동 킥보드를 탄 무리가 '부럽지?' 하면서 지나간다. 오늘 운동은 이걸로 퉁치자고 위로하면서 다시 게하로 부지런히 걸어왔다.


어제는 운동한 게 아까워서 꿋꿋하게 맥주를 참아 놓고서 오늘은 천오백을 마셨다. 아무래도 미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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