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유배일지] 올레 7코스

13일차

by 태희킷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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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0. 3.


탐라국으로 유배와서 순위에 들만큼 무척 화창한 날씨다. 내일 태풍 온다는 이야기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햇빛이 찬란하다. 이렇게 좋은 날 집 밖에 안 나가면 억울할 것 같아서 부지런히 준비해야겠다고 생각만 하고 아직 밍기적 대고 있다. 게스트분들이 나갈 때까지 어제처럼 옥상에서 책 좀 읽으려 했는데 흰 종이여백에 비친 반사광에 눈을 잃고 그대로 내려왔다.


외돌개랑 그 주위에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오기로 했다. 속도를 즐기시던 버스 기사 아저씨는 관성을 이겨낼 수 없었는지 내가 내려야하는 정류장을 깔끔하게 지나쳤고 당황하는 내 표정을 본 승객 아저씨가 사투리로 소리를 질러주셔서 무사히 내릴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외돌개라는 이름만 듣고는 전에 와본 곳인지 처음 온 곳인지 몰랐지만 주차장을 보고 왔던 기억이 났다. 가족 단위로 온 관광객들의 뒤를 따라서 오르막길을 올라갔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더 넓고 한적해서 좋은데 외돌개가 보이자마자 경쟁적으로 인증샷 찍느라 바쁘시다.


영화에서 보던 빨간 레이저센서 마냥 얼굴 높이로 이리저리 깔려있는 거미줄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7코스를 걷는다. 왼편으로 보이는 절경에 침흘리며 걷고 있는데 반대방향에서 오는 사람들이 절경을 보고 나보다 더 좋아하는 걸 보니 '아 더 가봐야 볼 게 없나 보다.' 싶어서 다시 돌아왔다. 황우지 해안은 끝내주는 뷰로 유명한 수영장 같았다. 갑자기 물위로 올라온 남자가 상의를 벗어제꼈는데 그의 어깨가 내 마음만큼이나 넓어서 모든 이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다분히 의도적이고 과시적인 행위처럼 보였지만 어깨연장에 힘써왔던 그의 노력에 마음 속으로 박수를 쳤다.


유배지에 와서 바다를 지겹도록 보다보니까 등대도 자주 본다. 근데 꼭 흰등대와 빨간등대가 함께 있던데 뭐가 다를까 싶어서 지식인에 찾아봤더니 바다에서 봤을 때 항로의 오른쪽에 설치된 게 빨간등대, 왼쪽에 설치된 게 흰등대란다. 오 근데 깜깜한데 배에서 색깔이 보이려나.


손전화의 GPS는 멀쩡한데 나의 공간지각능력은 멀쩡하지 않아 차도에 있는 표지판을 보면서 새섬으로 가고 있다. 지난 번에는 새섬이 닫혀서 못 갔는데 여기까지 온 김에 보고 가야겠다. 그래도 이렇게 나름대로 목적지를 잡고 가고 있었는데 헤매는 것처럼 보였는지 지나가는 아저씨가 어디 찾아가냐고 물으신다. 대충 의미 전달은 되는데 제주도 말은 뭔가 접미사를 빠뜨리거나 확 줄여버린 느낌이라서 나도 모르게 자꾸 예? 하고 되묻게 된다.


배가 너무 고파서 후다닥 새섬을 한 바퀴 돌았다. 전에는 어쩜 단풍이 저렇게 염색한듯이 한꺼번에 드나 했는데 매일 빈둥대면서 풀, 나무를 쳐다보고 있으니까 신기하게도 조금씩 변해가는 게 보인다.


흑돼지 두루치기가 먹고 싶었지만 1인분을 파는 곳이 없어서 떠돌다보니 서귀포 올레시장에 왔다. 아무 생각 없이 앞에 보이는 입구로 들어가서 고소한 냄새만 맡다가 사람이 몰려있는 분식집에 들어가서 다들 먹는 걸 시켜 먹었다. 떡볶이에 김밥, 달걀, 튀김까지는 익숙한데 뜬금없이 김치전에 나와서 좀 웃겼다. 이상하게 어울리는 맛이다. 세 시를 넘겨 먹는 점심이라 지독하게 맛있었다.


카페에 올라가서 미지근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는데 이웃 게스트하우스 형이 놀러왔다. 지난 주까지만해도 우리 게하 게스트였는데 같이 맥주 마시다가 갑자기 제주에 더 있다가고 싶다고 급하게 둥지를 트셨다. 그쪽엔 같이 일하는 스탭이 없어서 아마 자주 볼 것 같다. 머릿수를 하나 늘려 '저녁은 뭐 먹지' 고민을 하다가 옥상에서 과대불판 삼겹살파티를 했다. 파도소리에 섞여 지글지글 올라오는 고기향기가 넘나 낭만적이어서 자연스럽게 눈을 감고 맥주를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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