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차
2016. 10. 9.
날씨가 좋으니 김녕에 가야겠다. 느릿느릿 빨래를 해 옥상에 널어두고 김밥으로 점심1을 먹었다. 미취학아동이 소풍을 가나보다. 아 이런 날에 제주도로 소풍가면 안 신날 수가 없을 것 같다.
버스 맨 앞자리에 앉았다. 한쪽 귀로만 음악을 듣고 나머지 감각으로는 버스기사 아저씨가 승객들을 혼내는 걸 구경하고 있다. 시외버스라서 목적지를 먼저 말해야 하는데 관광객들이 목적지를 말하기도 전에 자꾸 카드를 찍어대서 아저씨가 노하셨다. 그래도 외국인 관광객들이 지도와 스마트폰을 내밀며 목적지를 보여줄때마다 선글라스를 내려 맨눈으로 확인하시고 친절하게 한국말로 "일단 타"라고 얘기해주신다. (어차피 가는 곳이 한정적이라 관광지 정류장에 도착하면 내리라고 크게 외쳐주신다.)
버스를 타고 두 시간만에 김녕성세기해변에 내렸다. ㄱㄱㅈ이 팬티두고 와서 비오는 날 아침에 다시 갔던 바다다. 물빛을 보니까 버스에서 보낸 두 시간이 아깝지 않다. 태풍을 맞아 풍력발전기 날개가 하나 부러져있는 것 빼곤 바라만 봐도 참 평화로운 일욜이다. 이 공간에 홀수는 나밖에 없는 듯하다. 짝수들은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꺄르르꺄르르 난리가 났다. 몇몇 짝수들은 웨딩촬영을 하고 있다. 하늘하늘 가벼워 보이는 하얀 원피스를 입은 예비신부보다 샤프란 광고에 나올 것 같은 핑크빛 원피스를 입은 들러리들이 더 신이 난 것 같다. 얼씨구 이제 자기들끼리 점프샷까지 찍는다.
추천받은 밥집 김녕샤는 태풍피해로 잠시 영업을 중단했다. 외국인 아저씨가 나보다 매우 훌륭한 발음으로 다음에 오라고 했다. 할 수 없이 해변 앞에 있는 매점에서 컵라면으로 점심2를 먹는다. 안경을 김으로 코팅해가며 사리곰탕을 먹는데 뒤에서 개가 자꾸 낑낑댄다. 한 입만 달라는 표정을 자꾸 보내서 나도 틈틈히 고개를 돌려 절대 그럴 수 없다는 표정을 보내줬다. 다 비우고 일어서니 짖어댄다. 개같다.
혼자 모래에 앉아 넋놓고 있다가 버스를 놓쳤다. 아 꼭 그걸 탔어야 했다. 사진기가 초점을 잡을 순간의 정차도 허락하지 않는 유배지 버스에서 노을을 통째로 봤다. 도착하니 해는 이미 졌다. 억울하다. 사진을 옮겨야 하는데 몸에 힘이 안들어간다. 낮잠을 안 자서 그런가보다. 9시도 안 되어 그렇게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