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차
2016. 10. 12.
아침밥도 건너뛰고 병원에 왔다. 애니메이션 속 박사님 캐릭터의 전형적인 목소리를 가진 의사선생님 앞에 오른손을 쭈욱 내밀고 징징댔다. 엄마 말도 잘 듣는데 왜 낫질 않는 거냐고 신세한탄 좀 하려고 바르고 있는 연고를 가져갔는데 지금 쓰고 있는 약이 병원에서 처방할 수 있는 가장 쎈 약이라면서 갸우뚱하신다. 무슨 일 하냐고 해서 그냥 컴퓨터 자판만 두드리고 앉아있다고 하니까 잠시 고민하시더니 병원에서 쓰는 수술용 장갑을 추천하신다. 손에 직접 닿는 걸 최소화하라면서... 네이버에서는 스테로이드 연고에 대한 평가가 너무 갈리고 있어서 별 효과도 없는데 계속 발라야하는지 잘 모르겠다. 별다른 소득 없이 먹는 약 며칠분을 받아들고 우울하게 병원을 나왔는데 오호 병원 옆에 맥도날드가 있다.
베이컨토마토디럭스 세트를 런치가격으로 주문했다. 두입 째 크게 베어물었을 때 따뜻한 토마토랑 그냥 소금덩어리 같은 베이컨이 통째로 딸려나와서 당황스러웠지만 침착하게 하나도 안 흘린 척을 했다. 속이 니글거렸던 어제 먹었으면 더 만족스러웠을 것 같다. 이마에 땀을 흘리며 빅맥을 시킨 외국 아저씨가 직원한테 '노머니 인 더 카드'라는 잔액부족 선고를 받고 맥도날드를 떠나는 안타까운 뒷모습에 시선을 두고 콜라를 마시다가 바닥에 왕창 흘렸다. 처음엔 '빌어드실 하필이면 리필도 안 되는 맥도날드에서 흘렸네'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고개를 드니까 눈썹이 올라간 직원 분이 콜라 흘린 바닥을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아서 냉큼 휴지로 닦고 착하게 한 번 웃어줬다.
길 건너에 농협이 있길래 들어갔다. 유배지에서 쓰는 돈이 얼마 안 되지만 얼마 전 후불교통카드를 만들어서 잔액확인을 좀 정기적으로 하려고 인터넷 뱅킹 신청서를 썼다. 병원에서 오른손 많이 쓰지 말라고 한지 얼마 안 된 시간이라 한 번 왼손만 사용해 신분증을 꺼내보기로 했다. 불안불안하게 지갑을 꺼내고 낑낑대면서 그 안에 있던 신분증을 내어주니까 직원이 좀 안타깝게 본다. 형광펜으로 표시된 부분을 착실하게 다 채우고 나니 '신청하시는 법은 아시죠?' 라고 걱정스럽게 묻는다.
버스 정류장 근처로 가다가 삼성전자 서비스센터도 있길래 들렀다. 언젠가부터 홈버튼에 키감이 전혀 느껴지질 않아서 매번 손톱을 바짝 세워 누르곤 하는 게 불편해서 들렀다. 첫눈이 오고 봉숭아물이 다 빠지면 바짝 세워도 더이상 손톱은 그 자리에 없을테니... 손전화를 열어보니 부품이 주저앉았다고 3만 8천원이라고 해서 그냥 모른 척 다시 닫아달라고 했다. 괜히 배만 가른 것 같아서 미안하다. 노트7 덕분에 서비스센터가 무진장 바쁘다. 아예 노트7 상담 전용으로 번호표도 발급하고 있었다. 서비스센터 곳곳에 뿌려져 있던 노트7 판매 및 수리 관련 팜플렛이 싸그리 회수되고 있다.
책을 빌렸던 도서관은 오늘 휴관인데 삼성 서비스센터 옆쪽에 어린이 도서관이 열려있길래 들어가봤다. 화장실 변기가 많이 작은 것만 빼면 완벽한 도서관이다. 공공도서관으로 엮여서 책반납을 여기서 해도 된다고 한다. 이번에도 <야구란 무엇인가>는 네 쪽정도 밖에 읽질 못했다. 한 번을 완독하기가 왜 이리 힘든지 모르겠다. 밀린 일기 좀 쓰고 있는데 옆게하 스탭형한테 연락이 왔다. 시장에 나가서 같이 닭을 먹었다. 양이 많아서 절반이 넘는 양을 포장해 돌아왔다.
매일 비슷한 시간에 달리기를 하는데 하루하루 갈수록 해가 빨리떨어지는 게 느껴진다. 코스를 한 바퀴 찐하게 돌고 엄마한테 전화했는데 밭에서 노느라 바쁘신 것 같아서 금방 끊었다. 핫샤워를 한 뒤 손 핑계로 며칠 간 안 했던 녹취를 푸는데 매번 들어도 나는 발음도, 발성도 노답인 것 같다. 자꾸 꿍얼꿍얼대서 안 들린다. 나랑 말하는 사람들 아... 좀 힘들 것 같다. 커서 아나운서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