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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유배일지] 피톤치드 뿜뿜

28일차

by 태희킷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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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0. 18.


사려니숲길에 가야지. 사려니숲길의 입구는 두 곳이 있는데 나야 당연히 몰랐으니까 730번 버스가 지나는 붉은오름 정류장을 지나쳤다. 뒤늦게 알고 환승할 수 있는 교래사거리에 내리긴 했는데 배고프니까 밥이나 먹으러 왔다. 네이버가 친절하게 소개해주는 걸 보니 아마도 이 동네 놀러오는 사람들은 다 이곳에 올 것만 같은 칼국수집이다. 교래는 닭이 유명해서 닭칼국수가 메인이란다. 후추맛이 강하지 않게 삐져나오는 닭곰탕 같은 뽀얀 국물에 녹색 칼국수 면을 달큰한 김치로 감싸 먹었더니 금방 칼국수 국물이 버얼게졌다. 그릇을 들고 국물을 꿀떡꿀떡 마시고 나니까 콜라가 먹고 싶어진다.


콜라 대신, 갓뽄의 메론소다 대신 수박소다를 사봤다. 사려니숲길을 나서기 전 시원하게 식도를 통과시키고 가려했는데 기대에 못 미치는 맛이다. 깊지 않고 싱거워서 마치 메론소다에 물 탄 맛 같다. 아하 그래서 워터멜론이로구나. 배를 꽉꽉 채우고 숲길을 걸으려니 오감이 둔해진 것 같아 좀 아쉬웠다. 낮잠생각도 나고. 숲길 중간중간에서 종종 보이는 벤치에서 도시락을 드시는 분들도 많았는데 그게 칼국수 한 그릇에 수박소다로 배를 팡팡하게 채우는 것보다 백 번 나을 듯 싶다. 소풍온 듯한 기분도 낼 수 있고.


귀로도 피톤치드를 흡수하려고 이어폰은 빼두었다. 처음에는 내 발에 낙엽이 깔리는 서걱서걱 소리만 들리다가 양 옆을 감싸고 있는 숲속에서는 투둑투둑하고 낙엽이나 조그만 열매가 떨어지는소리도 들린다. 위로는 꽤나 우아한 까마귀 날갯짓소리도 들리는데 목소리는 별로 우아하지 않은 것 같다. 조금씩 부분염색이 되어있긴하지만 사방이 넘나 초록초록해서 숲을 지나가면 초록이 콸콸 쏟아질 것 같다.


평일인 탓인지 주위를 둘러보면 숲길을 혼자 걷고 있을 때가 몇 번씩 있었다. 처음에는 오홋 이때다 싶어 빙글돌면서 파노라마 사진도 많이 찍고 숲속의 한적함을 만끽하며 신이나게 걸었는데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면 마치 엄청나게 높은 육교를 혼자 걷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심장이 기분 나쁘게 두근댄다.


그와중에 날개를 쫙 펼치면 나보다 클 것 같은 까마귀들이 꾸엑꾸엑 대면서 이리저리 날아다닌다. 만박기념공원 안에 있는 일본식 정원에서 봤던 까마귀떼의 모습과 기억 속에서 겹쳐지면서 팔에 소름이 돋는다. 까만 까마귀들의 더 까만 눈들이 한 번에 나를 향하더니 갑자기 날아들어 나를 쪼아먹을 것만 같은 상상에서 빨리 도망치고 싶어서 걷는 속도를 높인다. 신발 밑창에 자꾸 끼는 돌을 몇 번이나 빼내주면서 사려니 숲길을 무사히 통과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옆집 ㅅㅎㅇ형을 오늘도 만났다. 남원읍에 있는 순대집에 찾아갔는데 맛집답게 재료소진으로 이미 문을 닫았다. 건너편에 있는 동네피자집 앞에 변색된 포장할인 20% 플랜카드가 걸려있다. 걸어서 3분 거리에 있는 포구에서 피맥을 하기로 한다. 이제 아무때나 길바닥에 철푸덕 앉아있긴 좀 쌀쌀한 날씨라 약간의 우려를 품고 포구 앞에 갔는데 크으 오션뷰의 정자가 하나 서있다아. 안타깝지만 사려니숲길이 잊혀지는 맛이다.


정자에서 보이는 오른편 바다에 오징어들이 빨랫줄에 걸려있다. 해풍 맞은 반건조 오징어를 팔고 있다. 다가가서 일렬로 매달려 있는 오징어와 함께 우월한 셀카를 찍고 있는데 반건조 오징어 사장님이 오셔서 갑자기 귤을 주신다. 서울에서 왔냐고 묻는데 서울에서 왔다고 안하면 귤을 도로 빼앗으실 것 같아서 아이서울유를 마음에 새기며 서울사람인 척했다. 사장님 부부도 서울에서 오셨는데 이 동네에도 서울에서 온 사람들이 많다면서 집값도 얘기해주고 상권도 얘기해주신다. 관심은 없었지만 관심있게 듣고 나니 아예 귤을 한 봉지 싸주셔서 감사한 마음에 오징어 두 마리를 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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