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차
2016. 10. 19.
내일이면 옆집 ㅅㅎㅇ형이 육지로 올라간다. 마지막 날인만큼 지도앱만 들여다보는 뚜벅이에서 벗어나 탁 트인 해안도로를 달려보려고 아침부터 쏘카를 빌렸다. 시동소리와 함께 힘이 솟는다. 네비가 알려주는 남조로는 깔끔하게 무시하고 창문을 열고 소리를 꽥 지르면서 일주도로를 탄다.
협재에 들렀다가 야끼소바라고 적힌 현수막에 홀려 차를 세웠다. 둘 다 아침도 안 먹어서 메뉴판 글자만 봤는데도 야기소바의 조리예가 떠올라 침을 흘린다. 들뜬 목소리로 야끼소바를 주문했는데 야끼소바를 받아오는 일본 공장에 지진이 나서 안 된다고 한다. 아 괜히 하루종일 야끼소바만 먹고 싶어진 것 같아 매우 원망하며 나왔다. 근처에 유명하다는 우동집은 오후 3시까지 예약이 잡혀있다. 지금 열두 시도 안됐는데... 손님 하나 없는 조용한 국수집에서 고기국수라는 이름의 '설렁탕 적신 국수'를 먹었다.
아이스크림 하나 입에 물고 다시 함덕으로 간다. 둘 다 차가 있으면 어딜 가겠다는 세세하고 꼼꼼한 계획따위는 없고, 그저 버스만 타다가 차 타는 것만으로도 신이나서 그냥 실실대면서 간다. 차 스피커에는 S.E.S 노래랑 핑클노래가 사이좋게 흘러나온다. 조용한 함덕 서우봉 해변에는 커플 몇 쌍과 삼각대뿐이다. 밝은색 바다를 배경으로 꺄르르꺄르르 대는 걸 기분 나쁘게 구경하고 있는데 뒤에서 우글우글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방금까지 평화로운 함덕을 차지하고 있던 연인들은 수학여행 온 고등학생들에게 해변을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잘 됐다. ㄲㄲㄲ
어제 다녀온 사려니숲길을 지나 서귀포로 향하는 5.16도로를 탄다. 대관령을 떠올리게 하는 연이은 커브가 속을 울렁이게 했지만 '숲터널'이라는 이름의 길은 별로 좋지도 않던 날씨까지 좋아보이게 만들만큼 나이스했다. 차창을 통해 보이는 그림같은 길에 둘 다 입을 못 다물고 우어어어어 하다가 감탄이 뚝 끊겼다. 이어진 3초간의 정적엔 둘 다 같은 생각을 했으리라. '숲터널에 대한 기억에 하루 빨리 다른 사람을 채우고 싶다.'
가볍게 떨어지는 빗방울을 뚫고 드라이브를 마쳤다. 쏘카는 내리자마자 주행비를 계좌에서 빼앗아갔는데 오늘 총 132km를 달렸다고 한다. 5시간 빌려서 주행비를 이만큼이나 낼 거면 차라리 렌트카 하루짜리가 더 나았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매일 바다만 보고 살던 소년들은 억새가 이리저리 휘청이는 제주의 중간산 구석구석을 다닐 수 있었던 하루에 매우 만족해했다.
저녁에는 형들이랑 갈비를 먹으러 가서 양념게장을 4번 리필해먹었다. 냉정히 나를 돌아봤을 때 살이 빠진 것 같지는 않다. 앞으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