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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유배일지] 니가 싫어

31일차

by 태희킷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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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0. 21.


평소에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이른 시간에 우산을 들고 출근을 한다. 오늘부터 4일간 서귀포에서 호텔 청소 알바를 하기로 했다. 눈에 띄게 해가 짧아진 요즘 9시부터 4시까지라는 근무시간은 결국 풀타임이랑 같은 말이지만 유배의 꽃은 '노역'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20만원에 내 나흘을 팔았다.


객실수가 30개에서 3개 부족해 관광호텔도 아닌 이 애매한 곳은 생각보다 깨끗하고 깔끔한 새 건물이다. 서귀포 야경의 절반이라고 할 수 있는 새연교가 내려다 보이는 오션뷰 객실도 소유했지만 모든 객실을 드나드는 나는 정작 빌어드실 오션뷰를 보기 위해 허리를 펼 시간도 없다. 체크인 시작되는 시간에 맞춰 청소를 끝내려면 어쩔 수 없다. 점심시간 빼곤 따로 쉬는 시간도 없어서 간짜장을 오랫동안 비볐다.


돌아오니 알바를 소개해 준 스탭동생이 나를 맞아준다. 알바 어땠냐는 말에 이어폰을 빼서 버스에서부터 한곡 반복으로 듣던 노래를 들려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반자카파의 <니가 싫어>. 돌아가서 운동을 해야겠다는 다짐은 깨끗하게 잊고 젖은 빨래마냥 축 처진 내 몸을 쇼파에 널었다. 그 때 단체 손님들이 들어왔다. 기껏해야 서넛이 돌아다니던 게스트하우스에 18명이 한 번에 들이닥치니 존재만으로도 정신이 없다.


어디 한 군데 앉아있질 못 하고 방황하는 그들에게 편하게 짐 푸시라고 말씀드렸더니 눈썹을 잔뜩 세운 아재 한 분이 왜 공용화장실, 공용샤워실이냐고 묻는다. 싸움 잘 하실 것 같아서 그냥 조용히 노트북을 열고 마산야구장으로 향했다. 해커는 한 시간만에 닭이 도착할 때까지 노히트로 나를 미소짓게 하더니 양손에 닭기름 좀 묻히기 시작할 때쯤 뜬금없는 피홈런으로 웃음을 거두어 갔다. 스코어는 2:0이 되었고 나는 먹던 닭을 잠시 내려놓았다가 오돌뼈까지 깔끔하게 씹어 먹었다.


방에 들어가 두 손을 모았다. 군대에서 살을 쏙 빼온 희동이형은 감독님의 믿음에 응답했고 나는 입으로 베개를 막으며 소리를 질렀다. 홈으로 달리는 역전주자만큼이나 기분이 업돼서 꾸엑꾸엑 소리를 내며 잠을 못 이루고 있는데 갑자기 스탭방에서 고스톱 판이 열렸다. 유배지의 특성을 살려 판돈은 귤을 활용한다. 26개까지 땄던 귤칩은 3개만 남았다. 내일도 출근이라고 생각하니 잠이 몰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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