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일차
2016. 10. 27.
청소기의 소음을 뚫고 마을회관에서 무척이나 기계음 같은 육성 방송이 들려온다. 풍랑이 높다는 방송일 줄 알았는데 어제 들었던 그 방송이다. 신라호텔에서 마을 어르신들과 주민 여러분을 위해 점심식사를 준비했으니 마을회관으로 열 두시까지 모이시란다. 어제는 어르신들만 초대했는데 오늘은 주민들도 초대받았다. 나도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고 말끔하게 면도를 해서 빠르게 주민으로 변신했다.
이동네 주민스러운 템포로 슬리퍼를 찍찍 끌고 나오는데 제주방송국 차가 보인다. 괜히 옆에 서있는 차에 얼굴을 비춰봤다. 야무지게 먹어서 방송이나 한 번 타보자고 굳게 마음 먹고 마을회관 앞으로 갔다. 게하 문 열고 나올 때부터 향기가 심상치 않았는데 갈비와, 대하, 전복이 줄을 맞춰 석쇠에 누워있다. 그 앞에는 길이가 30cm는 되어보이는 긴 요리사모자를 쓴 아저씨들이 서있다. 외국인 요리사 아저씨도 보였는데 뜬금없이 30년 전통 김치찌개 고수처럼 생겼다.
어제 나왔던 방송대로 '신라호텔이 어르신들을 위해 점심식사를 준비했다' 라는 데 초점이 맞춰진 것 같은 분위기다. 주인공은 마을 회관 안에서 식사를 하고 계시는 어르신들이고, 동네주민들은 어르신들 덕분에 회관 앞 천막 밑에서 밥 한끼 얻어먹는 듯하다. 깔끔한 도기그릇 안에 찬이 세팅되어 있다. 자리에 앉았더니 갈비탕과 밥 한 공기를 가져다주셨다. 크고 작은 갈비덩어리가 국물 위를 유영하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벅차올랐다.
갈비탕 속에 촉촉해진 갈비와 석쇠 위에서 육즙을 지켜온 갈비를 번갈아가며 뜯는데 자꾸 실실 웃음이 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전복을 통째로 먹었다. 아직 12시 반이지만 오늘은 이대로 하루가 끝나버려도 억울하지 않을 것 같다. 디저트로 주신 멜론을 집어먹고 있는데 제주도 연예인들이 등장했다. 여섯시 내고향 리포터 톤으로 부녀회장님을 찾아다니다가 한 아줌마한테 묻는다. "어머님이 진짜 부녀회장이세요?! 아니 비선실세 말고!! 진짜 부녀회장님 어디 계신가요~"
사장님 카페에서 아.아를 한 잔 마시면서 놀다가 달리기를 한다. 이른 오후에 뛰었더니 얼굴이 좀 따갑다. 샤워하고 두꺼운 책을 읽는데 금방 노곤노곤해져서 20분간 꿀같은 낮잠을 잤다. 예비군 갔던 스탭동생이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저녁밥을 준비하기로 한다. 에릭의 게살볶음밥에서 게살은 빼고 굴소스볶음밥을 만들었다. 으 근데 참치랑 굴소스를 같이 넣으니까 약간 비릿향이 난다. 혼자 밥 먹을 땐 당연히 내가 해먹지만 같이 있을 때 내가 밥을 한 건 오늘이 처음이다. 아 3인분 밥 했다고 괜히 평소보다 피곤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