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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탁 진 Jun 24. 2022

장마와 우산

장마가 시작되었다...

                    장마와 우산 



  하수구를 통해 콸콸 도랑물이 내려가고 있다. 그런데도 마당에는 온통 흙탕물이 가득하다. 동생의 고무신이 하나 쪽마루 저쪽에서 둥둥 떠 다니고 있다. 


  하늘에서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다. 며칠째 인지도 모른다. 머리에 수건을 둘러쓴 아버지가 비를 맞으며 삽으로 연신 흙탕 물속을 헤집고 다니고 있다. 


  감히 물속으로 내려설 엄두가 나질 않는다. 대문간의 개집은 벌써 장독대로 올려져 있다. 개는 마당을 내려다보며 컹컹 짖어댄다. 골목보다 약간 낮은 우리 집 마당은 비가 많이 오는 장마철이면 자주 빗물에 넘쳐나곤 한다.


  어머니가 세숫대야를 들고 대문 안으로 들어온다. 역시 어머니의 머리에도 수건이 둘러져 있다. 옷은 이미 홀딱 젖어 있다. 허벅지까지 둘둘 말아 올린 옷도 흙탕물만 아니었지 빗물에 젖기는 마찬가지였다. 


  동생이 하품을 하며 쪽마루로 나와 곁에 쪼그리고 앉아 마당에 가득 찬 흙탕물을 바라본다. 자기의 고무신이 물 위에 떠 다니고 있는 것을 보고는 내신, 내신 하며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어머니가 고무신을 건져 마루 위에 올려놓는다. 


  마루 위에는 아버지의 낡은 구두, 누나의 까만 운동화, 나와 동생의 하얀 고무신들이 삐뚤삐뚤 아무렇게나 물에 젖어 뒹굴고 있다. 흙탕물 위로 쏟아지고 있는 빗줄기들... 시커먼 물은 빗줄기를 따라 하늘로 올라가려는 듯 통통 튀고 있다. 


  아버지는 계속해서 삽으로 하수구를 쑤시고 있고, 어머니는 대문을 열어놓고 연방 세숫대야로 흙탕물을 퍼 밖으로 쏟아내고 있다. 


  하늘을 본다. 날이 밝은지가 꽤 오래되었는데도 어두컴컴하다. 그 어둠 속에서 누군가 숨어서 물뿌리개로 물을 뿌리고 있는 것 같다. 아마 물이 뿜어져 나오는 구멍이 닳아 커졌나 보다... 화분에 물을 줄 때 주둥이가 부서진 물뿌리개로 물을 줄 때면 화분 안은 금방 우리 집 마당처럼 홍수가 났다. 한참을 기다려서야 물이 빠지곤 했다. 빨리빨리 온실 화분에 물 주고, 청소하고 집에 가야 하는 나는 일부러 주둥이를 빼고 물을 주기도 했다. 그러다가 선생님에게 들킬 때면 머리에 군밤을 맞기도 했지만... 


  물뿌리개 주둥이를 통해 뿜어져 나오는 물은 부드러운 봄비처럼 활짝 핀 꽃잎을 어루만지고, 푸릇푸릇한 잎새들을 씻으며 생명을 준다. 그러나, 내가 쏟아붓는 굵은 물줄기는 장마철에 쏟아지는 비처럼  예쁜 꽃들을 시들게 만들었다. 하늘에서 누군가 나처럼 시간이 없는가 보다. 빨리 쏟아붓고 다른 데 갈 생각이 있나 보다. 그러다가 선생님에게 들키면 군밤 먹을 텐데... 


  빗줄기가 약간 가늘어지기 시작한다. 마당의 고인 흙탕물도 아까보다는 많이 줄어들었다. 아버지는 마루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워 물고 물바다가 된 마당과 비가 내리는 하늘을 쳐다보며 후후 연기를 내뿜고 있다. 


  뒷채에 세 들어 살고 있는 이모가 조심조심 마당을 지나가고 있다. 손에는 물을 담은 바가지가 들려져 있다. 대문 밖으로 올라선 이모는 비닐 슬리퍼를 신은 맨발에 바가지의 물을 쏟아붓는다. 그리고, 흙탕물을 퍼내고 있는 어머니에게 눈인사를 하고 우산을 펴며 골목길을 빠져나간다. 우리는 그녀를 공장 이모라 불렀다. 진짜 이모는 아니다. 무슨 공장에 다니는지는 모른다. 


  아버지는 담뱃불을 마당으로 던지고 다시 삽을 잡는다. 동생이 방으로 들어가더니 다 쓴 공책을 들고 나와 한 장을 찢어내 종이배를 만든다. 나도 한 장을 찢어 종이배를 접는다. 완성된 종이배를 조심조심 넘어지지 않게 마당의 흙탕물 위에 올려놓는다. 종이배는 살짝살짝 흔들리며 물 위에 떠 다닌다. 입으로 바람을 만들어 분다. 동생도 따라서 입으로 분다. 종이배는 입바람에 밀려 앞으로 나아간다. 우리의 종이배는 머지않아 흐물흐물 물 위에서 배 모양을 잃고 쓰레기로 변해 버린다. 종이배에 우산이 없으니 비를 맞아 배안에 물이 차서 가라앉은 것이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 우산 배를 만든다. 동생은 만들 줄 몰라서 구경만 하고 있다. 


  다 만든 우산 배를 동생에게 주고 다시 하나를 더 만들어 물 위에 띄운다. 우산이 씌워진 배는 기우뚱기우뚱 흙탕물 위를 항해하다가 이내 축축하게 물에 젖은 종이로 바뀌어버린다. 우산도 종이로 되어 있으니 보나 마나지만... 아버지는 쓰레기로 변해버린 종이배를 건져 쓰레기통에 버린다. 우리는 계속 종이배를 만들어 물 위에 띄워 보낸다. 종이배는 빗방울에 비틀거리면서도 동동 떠다니고 있다. 장맛비는 계속 내리고, 마당에는 점점 물이 불어나고 있었다. 


  빗소리에 잠을 깼다. 아직 한밤중이었다. 꿈을 꾸었나 보다. 내일부터 장마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기상청 예보를 들어서였을까? 흐릿한 기억 속의 장맛비가 꿈으로 재현된 것인가... 창을 열어 내다보니 빗줄기는 점점 굵어지는 것 같았다. 


  이제부터는 우산이 많이 필요할 게다. 비가 예보된 날이나 비가 올 것 같은 날씨에는 외출할 때 나는 한 뼘 길이의 작은 접이식 우산을 가방에 챙겨 넣는다. 신발장에 돌아다니는 우산이 아무리 많아도 갑자기 내리는 비를 막아주지는 못한다. 지금 내가 가진 작은 우산만이 비를 막아줄 수 있다.   


  예전에는 결혼식이나 여러 가지 행사에 가면 답례품으로 우산을 받을 때가 많았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신발장 위에 그런 우산들이 몇 개씩 얹혀 있었다. 일부러 우산을 사지 않아도 될 만큼 적지 않게 생기곤 했다. 답례품으로 우산을 많이 선택하는 것은 적당한 비용과 몇 개씩 가지고 있어도 괜찮을 물건이라는 점, 그리 약소해 보이지 않을 만큼의 크기 등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또 다른 생각을 해보았다.   


  아들이 처음 시내버스를 탄 것은 장맛비가 내리던 어느 날이었다.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아들은 시내에서 일하고 있던 내게 우산을 가져다주고자 혼자서 찾아왔다. 제 엄마에게 단단히 교육을 받았겠지만, 비 내리는 어둡고 복잡한 시내의 길을 찾아온 것은 처음이었다. 우산 하나를 품에 안고서 내 앞에 나타난, 갓 열 살 먹은 아들은 마치 잃어버린 아버지를 다시 만난 듯이 기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아내의 연락을 받고 내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던 나도 반갑고 기특한 마음이 들어 연방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우리는 시내 패스트푸드 가게에 가서 아들이 좋아하는 햄버거를 사 먹었다. 집에 있는 동생에게 줄 햄버거도 하나 포장해서 함께 우산을 쓰고 버스를 타러 갔다. 마냥 어린아이로 생각되었던 아들이 어느새 키가 불쑥 자란 것 같았다. 거리에는 비가 많이 내리고 있었지만 우리에게 비를 막아주는 우산이 있어 아들도 나도 기분 좋게 걸었다. 저녁 공기가 다소 쌀쌀했지만 손으로 감싼 아들의 어깨에서 따스한 온기가 전해져 왔다.


  우산은 비나 눈을 맞지 않도록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물건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갖가지 고난이나 역경에 부딪치게 된다. 때로는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처럼  혼자서 극복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이럴 때 누군가 나의 우산이 되어준다면, 또 내가 그 누구의 우산이 될 수 있다면 세상을 헤쳐나가는데 한결 수월하지 않을까? 우리는 마음속에 언제나 누군가에게 씌워줄 우산을 하나씩 지니고 산다면 어떨는지...


  이제 장마라는 이름으로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한꺼번에 많은 양의 비가 긴 시간 내리면 피해도 적지 않을 게다. 온통 비에 젖은 날들이 끝나면 습기 가득하고 꿉꿉한 날씨가 우리를 땀나게 하겠지. 그리고, 다시 비가 내리고... 반복되는 장마의 지루한 나날이 계속되겠지만, 비가 그치고 잠시 해가 얼굴을 내미는 날에는 습기 찬 옷가지를 말리듯이 눅눅해진 우리의 마음도 내다 널어 말릴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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