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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탁 진 Jan 19. 2024

지금 우리 집 거실에서 들려오는 이 소리는...

아내의 영어 공부

             지금 우리 집 거실에서 들려오는 이 소리는...



  낮부터 내리던 겨울비가 어스름 저녁이 되도록 그치지 않고 내리고 있다. 홀로 방에서 책을 읽다가 문득 커피 생각이 나 주방으로 나가 커피메이커에 캡슐을 끼우고 스위치를 누르는데, 등 뒤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뒷덜미를 잡아챈다. 


  "여보, 이게 무슨 말인지 알아맞혀 봐..."  

  거실 소파에 앉아있던 아내가 핸드폰을 조작했다. 폰에서는 외국인이 영어로 뭔가를 말하고 있다. ??? 그다지 길지 않은 영어였지만, 나는 잘 알아듣지 못했다. 뭐야? 아내는 이것도 몰라하면서 연방 영어 문장을 들려준다. 마치 그것도 모르냐는 듯이... 


  뭐, 우리가 평소에 영어로 대화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영어 공부를 매일같이 하는 학생도 아니고... 지금 이 나이에 학생시절에 배웠던 영어 단어를 어찌 아직 기억하고 있을 것인가? 우리나라 말도 아닌 것이, 안 스면 다 잊어버리는 것이 당연지사이건만... 어찌 이것도 모르냐면서 놀리는 아내의 장난스러운 말에 피식 웃고 말았다. 


  요즘 아내는 영어 공부에 빠져 있다. 빠진 정도가 아니라 푹푹 빠진 게 맞는 말일 게다. 예전 같으면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서 TV 리모컨으로 시끌벅적한 웃음소리로 가득한 예능 프로그램이나 남들이 재미있다고 추천한 영화를 보느라 밤늦게까지 거실을 지키고 있곤 했다. 영화를 보기에 TV 화면이 좀 작다며 다음에는 더 큰 것을 사야겠다며 투덜거리던 아내였는데...


  그런데, 아내가 달라졌다. 언젠가부터 거실에서 들려오던 TV 소리는 들리지 않고, 영어로 말하는 외국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아내의 핸드폰에서 들리는 소리다. 어느 날 갑자기, 영어 공부를 해야겠다며 EBS 영어강좌를 듣고, 폰에 앱을 깔아 시간만 나면 틀고 다닌다. 화장실을 갈 때도, 설거지를 하면서도, 잠자리에 누워서도, 항상 폰을 들고 다니면서 영어 목소리를 줄줄 흘리고 다닌다. 


  간혹 내게 와서 단어나 문법에 대해 물어보기도 하지만, 혹여 긴가민가 하면서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을라치면, "것도 몰라?" 하면서 자기 핸드폰에다 물어본다. 요즘 핸드폰은 정말 똑똑하다. 우리말을 영어로 척척 번역을 잘해 준다. 아내의 폰에서는 금세 정답이 흘러나온다. 처음부터 제 폰에게 물어볼 것이지, 왜 나를 머리 아프게 하는 건지... 그러면서도 아내는 혼자 영어 공부를 하다가도 심심하면 네게 와서 즐거운 목소리로 나를 시험에 들게 만든다. 그게 아내의 브레이크 타임인 것처럼... 


  아내의 영어 공부는 어느 집 어린아이들이 보는 영어 동화책을 펼쳐보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영어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의 집에 갔다가 영어 동화책을 보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고... 어린아이가 보는 책쯤이야 했지만 막상 보니 모르는 단어들이 불쑥불쑥 나오고, 분명 아는 단어인데 어떻게 해석해야 될지 머리가 하얗더라고 말했다. 하긴 옛날에 알았던 단어도 다 까먹었을 텐데...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많은 건 당연할 일이었다.  


  보통은 아, 그래, 기억 안 나는 게 맞지... 에이, 모르겠네... 하고 말 일이지만, 아내는 그것이 스스로에게 굉장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고 했다. 어린아이도 줄줄 읽는 책을 어른인 자기가 못 읽는다니... 어쩌면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상심이 컸었나 보았다. 


  그러더니, 어느 날부터 아내는 TV를 끄고, 인터넷 서점에서 영어문법책을 사고, 핸드폰으로 영어강좌를 듣기 시작했다. 


  "지금 머리 아프게 뭐 하려고 영어 공부를 해? 혹시 여행 갈 때 쓰려면 영어회화나 하지. 안 그래도 신경 많이 써서 머리카락 빠진다면서... 이 나이에 토익 시험 볼 거도 아니면서..."  

  "난 어디에 써먹기 위해 공부하는 게 아니라, 모르는 게 있으면 못 참아서 그래... 내가 학교 다닐 때 왜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지 못했나 후회스러워..." 


  아내는 공부가 취미인 사람이다. 공부하는 걸 좋아한다고나 할까. 남들은 공부, 공부하면 머리가 아프다며 대부분 좋아하는 이가 별로 없지만, 아내는 그렇지 않은 거 같다. 뭔가 한 곳에 빠지면 정신없이 파고드는 성격이다. 몇 년 전, 공인중개사 시험을 볼 거라며 몇 달 동안 책과 씨름을 하더니만, 어렵지 않게 자격증을 따버렸다. 문제는 공인중개사의 일이 아내의 성향과 맞지 않아 제대로 써먹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간혹 아내가 하는 말, "누가 나에게 공부만 하라고 하면 좋겠다..." 공부만 하면 누가 돈을 주나?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흘러 이제는 노년을 바라보는 나이에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어딘가에 몰입하고,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려는 마음이 있는 아내가 대견스럽고, 늘 노력하는 자세가 아름답다. 


  세상은 늘 새로운 것들을 토해내고 있다. 날이 갈수록 더 많은 지식이나 정보를 만들어내고 있다. 우리는 이제 배우지 않으면 살아가기 힘든 시대를 살고 있다. 매일같이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알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고,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공부하기를 좋아하는 아내는 그런 면에서 보면 새로운 것에 잘 배우고 적응하는 거 같다. 


  오늘밤도 아내는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린 영어 공부를 하느라 거실에서 낯선 외국인의 말을 따라 하느라 열심이다. 머지않아 해외여행을 갈 때, 나는 아내의 손만 꼭 붙잡고 다니면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내가 그동안 열심히 공부한 유창한 영어로 나를 편하게 데리고 다닐 게 분명하니까... 정말 그러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아내는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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