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결혼식 축사
연리지 나무같이 살아라~~
휴일 아침, 편안하고 기분 좋게 눈을 떴다. 온 집안이 조용하다. 걱정거리도 긴장된 마음도 깨끗이 사라지고 마치 혼자 드넓고 푸른 초원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내색은 안 했지만, 긴장감과 조마조마한 마음에, 한 마디로 어떻게 시간이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아들의 결혼식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혼주로서 손님들 맞이하고, 감사 인사를 하고, 혼주 자리에 앉아 자식의 결혼을 축하하는 일이다. 하나 더 해야 할 것이 있다면, 인생의 첫 발을 내딛는 아이들에게 덕담, 축하의 말을 한마디 해야 한다는 거......
예전에 우리가 결혼할 때는 대부분 스승님이나 나름 이름 좀 있는 명사를 주례사로 초빙해 좋은 말씀 한 마디 해주십사 했었는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주례사 대신에 양가 부모님이 성혼선언이나 축사를 직접 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맡은 중차대한 일이 바로 축사 한 마디 하는 것이니...
대충 예상은 했지만, 막상 아들로부터 요청을 받고 나니, 아버지로서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머리가 수많은 말과 단어들로 뒤죽박죽 하다가, 한순간 모든 말들이 사라져 버리며 하얗게 백지장이 되어버리곤 했다.
너튜브에서 남들이 올린 다양한 나름대로 재미있고 눈물 나는 감동의 축사들을 여러 개 보았지만, 역시 그것은 그들의 이야기일 뿐 우리에게는 그다지 맞을 리도 없으니...
과연 새로운 인생의 출발을 하려는 아이들에게, 많은 하객들 앞에서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혹여 긴장과 떨림 때문에 제대로 말이나 할 수 있을지... 결혼식 한 달 전까지도 축사 원고에 한 글자도 써넣지 못하고 있었다.
한 사람이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정말 수많은 일들을 마주하고 해결하고 예약하고 확인해야 한다는 걸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우리는 부모님들이 다 그 일들을 해주었고, 우리의 아이들은 시대가 바뀌어서 아이들이 그 일들을 스스로 다 하니... 정작 어른들이 결혼 준비하는데 크게 할 일이 없는 거 같고, 그저 마음만 우왕좌왕하는 거 같았다. 준비하는 내내 아들과 아내의 휴대폰만이 바쁜 벨소리를 울렸으니... 나 역시 내게 주어진 숙제를 해야 하는 것 때문에 나름대로 머릿속이 저 혼자 바빴다.
결혼을 한다는 것... 결혼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건지... 나의 서른다섯 해가 넘는 결혼생활을 돌이켜보면, 나는 아들 부부에게 이렇게 저렇게 살아라고 말할 자격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되뇌어보았지만, 그다지 그런 거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남들 다 아는 그저 그런 말을 할 수도 없고...
이리저리 밤낮을 헤매다가 문득 아주 오래전에 남해 바닷가에서 들었던 부부나무가 생각났다. 아마 그때도 이맘때의 겨울이었던 거 같다.
남해 해변을 따라 길게 늘어선 숲이 있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과 파도를 막기 위해 나무를 심어 울타리를 만 든 것이다. 방조림의 또 하나의 목적은 물고기를 해변 가까이 끌어들이기 위함이라고 한다. 푸른색을 좋아하는 물고기들이 바닷가에 심어놓은 나무와 숲의 푸른 빛깔을 보고 해변으로 몰려온단다.
느티나무, 푸조나무, 비자나무, 물푸레나무, 이팝나무 등등 이름도 다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종류의 나무들이 마치 방패를 앞세운 전경들처럼 거친 바다와 대치하고 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렇게 바람과 파도에 맞서고 있었을까? 비스듬히 기울어진 나무도 있고, 혹여 바람 한 줄기라도 새어 나갈까, 손에 손잡고, 팔에 팔을 끼고, 몸과 몸을 서로 맞대어 세파에 절대로 밀리지 않으려 애를 써 버틴 흔적들이 고스란히 상처로 남아있었다.
나무의 둥치가 하도 굵어 두 팔로 안아보았다. 한 아름이 넘어 차마 손끝이 서로 닿지 않는다. 얼마나 오래된 나무일까? 얼마나 많은 파도와 바람을 맞서 이겨내었을까?
그 순간, 씩씩한 아줌마가 생각났다. 집에 있는 아내가 어느새 달려왔는지 그 나무들과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날렵하고 늘씬했던 아가씨의 개미허리는 어느 순간부터 자식과 가족을 위해서 세상에 맞서 싸우느라 굵고 튼튼한 통나무 허리가 되어버렸다.
아마도 이 나무들도 처음에는 모두 다 가늘고 약했을 게다. 가만히 나무에 팔을 두르고 있으려니 힘겨운 풍파와 모진 세월을 이겨낸 이야기들이 조곤조곤 들리는 듯했다.
안내를 맡은 문화해설사가 이 숲에 연리목이 있으니 한번 찾아보라고 했다. 연리목은 두 개의 나무가 서로 몸을 맞붙여 하나의 나무가 된 것을 말한다.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차 가지를 뻗다가 가지가 서로 맞닿아 붙어버린 걸 '연리지'라고 하는데, 사람들은 이걸 보고 '부부나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함께 손잡고 사는 모습이 부부 같다고 생각했을 게다.
그런데 가지가 아니라 아예 나무둥치가 서로 맞붙은 걸 '연리목'이라 한다. 정말 이게 가능한 일인가 싶었다. 해설사의 말로는 같은 종류의 나무가 아니라 다른 나무들이 서로 몸을 합친 것이라고 한다. 곁에서 자라면서 서로 마음이 끌렸던 것일까? 마음이 서로의 몸을 끌어당겨 입맞춤하고 살을 비비다가 결국 한 몸이 된 걸까?
그렇게 연리지처럼 인생의 풍파를 견뎌낸 아내와 나의 자식이 이제 결혼을 하게 되었으니...
< 부부 >라는 글자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꼭 두 사람이 서 있는 거 같지 않은가? 손만 옆으로 더 뻗으면 연리지 같은 모양이 될 게다. 서로의 가지를 뻗어 하나가 된 나무라...
많은 사람들 앞에서 두 손 꼭 잡고 사랑의 서약을 하고 있는 아들 부부의 그림이 떠올라 나는 이 연리지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리지 나무처럼 서로를 많이 사랑하고, 잡아주고 의지하며, 함께 성장하는 그런 부부...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발고 단아한 모습의 예쁜 며느리... 내게 늘 따뜻함을 주었던 아들의 마음을 이제는 함께 손을 잡고 있는 인생의 동반자에게 평생토록 이어 주기를 아들에게 당부했다. 앞으로 연리지 같은 부부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나의 축사는 정신없이 뚝딱 끝이 나고 말았다. 긴 시간을 준비했건만, 끝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으니... 아, 인생은 이런 건가... 허무해라~
아무튼 많은 축하객들 덕분에 성대하고 차분한 나의 첫 번째 자식 결혼시키기 행사는 무사히 치를 수 있었다. 결혼준비한다고 아들과 아내가 많이 신경 쓰고, 마음을 졸였겠지만, 이제 우리 인생의 또 하나의 관문을 통과했으니, 새로운 삶을 설계하고 가꾸어나가는데 힘써 노력해야 할 것이다.
아들과 며느리는 다음날 발리로 싢혼여행을 떠난다. 그런데, 아내도 딸과 함께 여행을 간다고 한다. 그간 정성을 들여 키운 아들을 시원섭섭하게 장가보냈으니, 기분전환도 하고 바람도 쐴 겸 딸이 제 엄마를 위해 이탈리아로 둘이 연리지처럼 손 잡고 효도여행을 떠난다고 한다. 살다 보니 아내는 나뿐만 아니라 어느새 자식들과도 연리지를 뻗고 있었다.
모든 행사를 마치고 대구로 내려오는데, 이제 내 며느리가 된 예쁜 목소리가 전화를 해 왔다.
"아버님~~ 오늘 감사했습니다~~ 잘 살겠습니다~~"
그래, 행복하게 잘 살아라~~ (아들은 반납불가이니 고쳐가면서 살기를... ^^)
이제 내 휴대폰에 또 한 사람의 가족 이름이 올라가게 되었다. 어떻게 적으면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