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군대시절에 만났던 사람들...
팔공산 커피자판기 아주머니...
요즘 거리에서나 건물 안에서 커피자동판매기를 찾기가 꽤나 힘들어졌다. 별다방이니 이름도 낯선 분위기 있는 카페들이 예전 커피자판기 만큼이나 거리에 많이 있다.
동전 몇 개 넣고 밀크커피, 프림커피, 설탕커피 그리고 국산 입맛을 위해 마련된 율무차 버튼을 선택해 누르면 종이컵이 툭 떨어지고, 금세 쪼르르 뜨거운 물이 커피와 함께 내려와 따뜻한 자판기커피가 만들어졌다.
간편한 인스탄트 커피였지만, 값 싸고 어디서나 쉽게 마실 수 있는, 한 마디로 서민적인 커피였다. 따뜻한 종이컵을 들고 거리 한쪽에서 서성거리며 마시는 커피 한 잔은 아주 짧은 시간 기분전환이나 마음의 안식을 찾아주기도 했다.
커피 한 잔을 타서 마시면서 문득 오래전 군대시절 커피자판기 아주머니가 떠올랐다.
팔공산 남쪽 중턱, 백안이라는 동네에서 오른쪽으로 갈라지는 길을 따라 올라가면 갓바위로 올라가게 된다. 갓바위로 올라가는 길 중간쯤에서 다시 오른쪽으로 나 있는 길로 한참을 가게 되면 예비군 종합훈련장이 나온다.
지금은 도로포장도 되었을 것이고, 부대다운 면모를 갖추었을 것이지만, 내가 근무하던 1985년 당시에는 백안에서부터 비포장 길이었다. 걸어가다가 지나는 차바퀴에 의해 날리는 먼지를 하얗게 뒤집어 쓰기가 일수였고, 비오는 날이면 먼지대신에 질퍽한 진흑들이 신발에 달라붙어 걷기가 불편했었다.
방위로 나는 그 예비군 종합훈련장에서 PX병으로 근무했었다. 훈련장에는 각 구별로 운동장과 사격장, 기타 훈련장들이 있었고, 그 운동장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PX들이 있었다. PX에서는 예비군들에게 빵과 우유, 음료수등을 팔았다. 각 PX건물옆에는 음료수자판기와 커피자판기가 놓여 있었다. 음료수자판기는 PX에서 관리 하지만, 커피자판기는 외부인의 소유였다.
당시 우리가 관할하던 PX앞에 있던 커피자판기들은 두 사람이 관리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아니라 두 아주머니였다.
수성구 커피자판기는, 지금 기억으로는 50대로 보이는, 안경낀 약간은 젊어 보이는 아주머니였고, 남구관할 커피 아주머니는 얼굴에 주름이 보일 만큼 나이가 들어 보이는 아주머니였다.
그런데, 두 사람은 여러가지로 차이가 있었다. 수성구 아주머니는 이삼일에 한번씩 재료를 채우러 올 때마다 좀 낡았기는 했지만 자가용을 타고왔다. 옷도 맵시있게 입고 다녔다.
자판기에 생수를 채워 넣을 때도 말통을 자기의 차로 실어 날랐다.
반면에, 남구 아주머니는 한마디로 서민의 모습이었다. 물론 나이도 있어 그렇게 보이기도 했지만, 남구 아주머니는 하루에 두 번 훈련장앞을 지나는 버스를 타고 왔다. 어떨 때는 점심시간에 맞춰 도시락을 싣고 오는 탑차의 짐칸에 타고 오기도 했다.
나도 그 탑차를 몇번 타 보았지만 정말 끔찍한 시간이었다. 매일같이 예비군들에게 도시락을 파는 도시락회사가 있었는데, 어쩌다 차가 없어 백안에서 걸어올 때 이 도시락을 실은 차를 만나면 그 차를 얻어 타고 올라오곤 했다.
운전석 옆에는 자리가 없으니 천상 짐칸에 타야했다. 거의 밀폐되다시피한 짐칸에는 김이 무럭무럭나는 밥을 담은 도시락들이 가득 실려 있었다.
그 열기, 그 반찬냄새, 정말 더운 여름에는 한 시간을 걸어 오는 한이 있더라도 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차를 놓치거나, 시간이 급하면 어쩔 수가 없을것이다.
남구 아주머니는 도시락차의 짐칸에서 내릴 때면 온 얼굴이 벌겋게 달아 있었고, 옷은 땀으로 젖어 있을때가 많았다.
생수를 떠서 자기 구역으로 갈때는 그 가볍지 않은 말통을 끙끙거리며 날랐다. 어쩌다 PX병이 지나다 보게되면 들어 주기도 했지만 아주머니의 얼굴에 난 주름은 고생이 많았다는것을 말해주고 있었따.
쉬는 시간이 되면 예비군들은 PX에 와서 음료수나빵, 과자들을 사 먹었다.
전날저녁 술을 마신 사람들은 컵라면을 빼 먹기도 하고, 시원한 콜라나 커피를 먹기위해 자판기를 이용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런데 이 기계라는게 그렇듯이 한번씩 고장을 일으키곤 했다.
돈을 넣고 버튼을 눌렀는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으면 예비군들은 마치 자판기가 김일성이라도 되는듯이 주먹으로, 군화발로 쾅쾅 때리고 걷어찼다. 심지어 칼빈총의 개머리판으로 치기도 했다.
"야! 이거 왜 이래? 돈도 안나오고, 커피도 안나오잖아."
한사람이 씩씩 거리고 있으면 가까이 있던 다른 사람들도 무슨일인가 싶어 모여들어 같이 발로 차 주기도 하고, 동전 반환 손잡이를 뽑을듯이 비틀어 대곤 했다.
누군가 PX 판매구에 얼굴을 들이밀어 자판기가 고장났다고 신고까지 해주기도 했다. 참으로 진한 전우애라 하지 않을 수 없따.
평소에 얌전한 사람이나, 사회에서 존경받는 선생님이나 교수님들조차도 개구리복만 입으면 사람이 달라진다.
똑같은 복장에 자신을 숨기기가 쉬워서일까? 우리는 예비군을 야비군이라고 부를때도 있었다. 야비한 군인.
커피 아주머니가 맡겨놓고 간 열쇠를 찾아들고 나가서 한창 자판기를 때려죽일 공산당으로 삼아 군화발로 차고있는 야비군들을
뒤로 물리며 자판기를 열어보았다. 동전투입구 중간에 걸려있는 동전이 생소하게 보였다. 손가락으로 빼 보면 100원짜리 한국동전이 아니라 크기나 색깔은 비슷한데 100원짜리가 아니었다. 처음보는 동전이었따.
뒤에서 이를 지켜보던 누가 말했따.
"어? 이거 코인아냐?"
"코인요?"
"왜 거 있잖아. 이거 이거."
그 예비군은 손잡이를 잡아 당기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것은 수박이 그려진 성인오락실에서 쓰는 코인인 것이다. 아마도 코인의 정체를 가르쳐 준 그 야비군은 슬롯 머시인에 돈 꽤나 갖다 받쳤을 것 같다.
나는 누가 이런 동전을 넣었는지 주이에 둘러선 야비군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따.
하나 둘 자판기곁을 슬금슬금 떠나갔다. 나는 그런 전우를 둔적이 없다는듯이...
분명 한 사람의 야비군이 가짜동전을 넣고 공짜커피 한잔 마실려고 했다가 동전이 걸려 실패하였으리라. 사람들이 모이고 자판기가 열리는 것을 보고는 도망갔을 거라 생각했다.
에이, 나쁜 야비군. 나는 멀리 사격장에서 들려오는 총소리를 들으며 분명 그 야비군은 자기의 양심을 과녁에다 걸어 놓고 총알을 퍼부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간혹 자판기 아주머니들이 수입으로 들어온 동전들을 PX에서 종이돈으로 바꾸어 가는 일이 있었는데, 그 자판기에서 나온 동전들 중에 이런 가짜동전들이 대여섯개씩은 나왔다. 요행히도 동전투입구를 통과한 가짜동전들이었다.
그럴때면 아주머니와 함께 투두두두두!!!! 죽어라! 야비군들!!! 입에서 침이 튀었다.
한차례 정신 없는 점심시간이 지나면 PX근처에는 온통 쓰레기들이 나뒹굴었다.
졸병들은 넝마주이처럼 부댓자루를 하나식 들고 널려진 쓰레기들을 수거하러 다녔다. 그늘진 산언덕, 계곡들 바위 사이사이에 숨겨놓다시피한 컵라면 껍데기들, 빈깡통들, 콜라병, 종이컵들을 찾아 수거했다.
커피 아주머니들은 자주 PX병들에게 커피를 빼주곤 했는데, 수성구 아주머니는 주로 고참들만 챙겼으나, 남구 아주머니는 오히려 졸병들에게 더 자주 챙겨주었다.
계급이 상사인 PX 관리관은 더 젊고 살랑거리며 친한척 하는 수성구 아주머니에게는 여러가지로 편의를 봐 주었지만, 늙고 무뚝뚝하고 기분도 맞춰줄줄 모르는 남구 아주머니에게는 잔소리를 했다. 자판기가 더럽니, 종이컵들 좀 자주 치우라느니, 왜 남구 자판기는 고장이 자주 나느냐등... 작대기 두 개가 보기에도 저 상사는 뭔가 한쪽에서 얻어 먹는게 있을거야 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며칠동안, 남구 아주머니가 올라오지 않았따. 무슨일이 있는 걸까?
남구 PX를 담당하는 졸병에게서 남구의 커피자판기 재료가 다 떨어졌다는 연락이 왔따.
나는 남구 PX로 내려갔다. 자판기앞에는 예비군 서너명이 서 있었고, 졸병은 그 앞에서 무언가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가지고 온 자판기 열쇠로 문을 열어 보았다. 커피재료는 바닥 나 있었다. 물도 거의 다 떨어져 빈 통이었다. 졸병에게 생수를 한 통 떠 가져오라고 시키고,함께 들고온 커피재료를 통에 쏟아부었다. 생수를 채워넣고 자판기문을 잠궜다.
몇번이고 해보았던 것이라 자판기 주인처럼 할 수 있었다.
동전을 넣었다는 예비군에게 동전을 돌려주고 커피를 뽑아 보라고 했다.
나는 커피를 뽑아 마시는 예비군들을 뒤로 하고 계곡을 따라 걸어 올라갔다. 무슨 일일까? 무슨 병이라도 난 걸까? 몸도 그리 건강해 보이지는 않았는데... 나는 계곡옆의 나무그늘에 걸터앉아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로부터 이틀뒤, 남구 아주머니는 해쓱한 얼굴로 올라왔다. 아팠는가 보았다.
자판기를 정리하고는 나와 졸병들에게 커피를 돌렸다.
"며칠동안 죽다 살았어. 자네가 내 자판기 봐 줬다며? 고마우이."
"아주머니, 몸은 이제 괜찮으십니까? 뭐, 특별히 한 게 있나요? 있는 재료들 쏟아 부은것 밖에요."
아주머니는 한숨을 쉬며 신세한탄을 했다. 자식놈이 하나 있었는데 그만 사고나서 세상을 떠났다고, 아들이 죽고나자 며느리는 아이들 데리고 어디론가 떠나 버렸다고 말했다. 지금은 혼자서 산다고. 그래서 몸이 아프면 돌봐 줄사람이 없다고. 나는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커피를 마셨다. 평소에 자주 즐기던 커피가 그날은 씁쓸한 맛이 났다.
세월이 흘러 제대를 햇따. 예비군 훈련장의 PX와도 이별을 했다. 야비군들과도 이별을 했다. 그리고 그 커피 아주머니와도 이별을 했다. 몇년이 지나 내가 개구리복을 입고 다시 그 예비군훈련장에 갔었을 때, PX에도 가보았다.
여전히 PX병들은 빵과 과자를 팔고 있었고, 여전히 발로 차는 야비군들을 밀어내며 자판기에서 가짜동전을 꺼내 보이며 범인을 잡아 보려는 광경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PX앞에서 콜라를 마시며 추억에 잠겼다. 잠시후 차를 타고 나타난 세련된 아주머니가 커피자판기에 열쇠를 꽂고 잇는 것을 보았다. 동전을 넣고 커피를 빼면서 언제부터 이곳 자판기를 운영하였냐고 물어 보았다.
2년째라고 했다. 그리고 이곳뿐만 아니라 전 예비군 훈련장안에 있는 모든 커피자판기는 자기가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예전의 그 남구 자판기 아주머니는 어디로 갔을까?
오랜 세월이 흘렀다. 지금은 어디에서 살고 있을까? 지금도 커피자판기사업을 하고 있을까? 어쩌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때 이미 얼굴에 주름이 많이 보였을 정도로 나이가 들어 보였으니까...
커피 한 모금이 입 안에서 뱅뱅 돌아다니며 쉽사리 넘어가질 않는다. 단지 동전 몇 개로 빼 먹을 수 있는 커피였지만, 그 종이컵에 담긴 커피는 인생의 달고 쓴 맛을 지니고 있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