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날, 노란 은행잎 떨어진 거리에서

한아름 은행나무처럼...

by 탁 진

노란 은행잎 떨어지는 길을 걸으며...

낮에 잠시 거리를 혼자서 걸었다. 얼굴에 서늘하게 스치는 바람 속에서 어느덧 노란 은행잎처럼 세월에 물들어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멈칫 걸음을 멈추었다. 바쁘게 살면서 내 나이가 얼마인지 헤아려볼 새도 없이 나는 이미 가을을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무는 때를 알고 스스로 거두고 이루어낸 것들을 욕심부리지 않고 하나 둘 놓아버리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떨어지기 전의 단풍잎들이 그토록 예쁘고 아름다운가 보다. 저런 것에도 생의 의미가 깃들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손을 내려다보았다. 나도 모르게 손아귀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살면서 마음은 비우려 애를 쓰지만, 생각과 달리 어느새 내 손은 무엇을 잡으려 이리도 허공만 허우적거리고 있는가? 새파란 가을 하늘은 너무나 멀리 있는데 말이야.

내 젊은 날에 경기도 양평 용문사에 간 적이 있었다. 거기서 나는 거대한 은행나무를 보았다. 나무는 맑고 푸른 가을 하늘을 다 뒤덮을 만큼 높고 우람한 자태로 우뚝 서 있었다. 수령이 천년이 넘는다고 했다. 나라에 큰 일이 닥치면 울음소리를 낸다고도 하는 이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 우리 민족을 지켜온 어머니와 같은 존재가 아닐까? 늘 한 자리를 묵묵히 지키며 지나온 고난의 세월이 가을 바람에 날리는 은행잎 만큼이나 수많았을 게다. 감탄의 눈길로 고목을 올려다보는 나를 은행나무는 그저 말없이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몇 년 전, 어머니의 칠순 생신을 맞아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조촐한 식사를 했다. 뜨거운 태양 아래, 거센 비바람 속에서도, 앞이 보이지 않을 눈보라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고 꿋꿋이 버틴 은행나무가 알알이 열매를 맺듯이 자식들을 살뜰히 키우셨다.

땅에 떨어진 열매가 다시 어머니의 세월을 따라 자라서 나무가 되고, 그 나무가 자라서 또 열매를 맺어 방 안 가득 웃음소리가 넘쳐났다. 손자, 손녀들의 고사리 같은 손이 샛노란 나뭇잎처럼 즐거이 팔랑거리고, 아이들 웃음소리가 은행 알처럼 온 방안을 또르르 굴러다녔다. 어머니는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속이 든든하시다며 고기도 먹지 않고서 내내 웃으며 자식들, 손주들 앞에 익은 고기만 부지런히 내려놓았다.

며칠 전이었다. 아이들이 회를 먹고 싶다고 하여, 아내가 배달을 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회는 도착했는데, 아직 아들이 학원에 갔다가 돌아오지 않아서 우리는 기다려 같이 먹기로 하였다. 그런데, 아내가 주방 식탁에 앉아서 가져온 매운탕 국물과 함께 서둘러 밥을 먹고 있는 게 아닌가! 왜 있다가 같이 먹지 않고 혼자서 먹느냐고 물었더니, 회가 생각보다 양이 적다며 자기 배가 불러야 아이들 좀 더 많이 먹을 거 같다고 말했다. 나는 그 순간 아내에게서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아이들 말대로 내내 집안에서 잔소리만 한다던 아내가 자식에게 맛있는 것 하나라도 더 먹이려고 하던 걸 보고 어머니 생각이 난 것이다. 아이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에 미소 짓는 아내의 모습이 어릴 적 어서 먹으라고 재촉하시던 바로 그 어머니의 웃는 얼굴이었다.

결혼 오십 년 만에 처음으로 직접 꽃집을 찾아가 어머니의 생일 축하 꽃다발을 사셨다며 건네주시던 아버지를 보고 우리는 모두 놀라움과 감동에 젖어 손뼉을 치며 환호성을 올렸다. 괜스레 돈 낭비만 했다며 궁시렁거리는 타박 속에서 오십 년 전의 수줍은 새색시의 모습을 보았다. 어머니도 역시 여자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그동안 잊고 살았던 것이다. 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어머니의 자리 때문에 포기해야 했을 착하고 가녀린 여인은 칠순 노인네가 되어서야 비로소 겸연쩍게 웃고 있었다.

머리 위로 나뭇잎 하나가 ‘툭!’하고 떨어졌다. 무게를 알 수 없는, 그저 느낌만이 있었다. 아마도 처음이었을 거다., 어머니를 업어본 것이. 어쩌다가 칠순이 되어서야 업어보게 되었는지. 마치 머리 위에 얹힌 나뭇잎 한 장의 무게. 업고도 업지 않은 것처럼 그저 느낌만이 등짝에 전해져왔다. 그렇게 나뭇잎처럼, 깃털처럼 가벼워진 어머니를 업고도 나는 쉽사리 발걸음을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너무나 무거워서, 어머니의 살아온 지난 세월이 무거워서, 가슴에 품은 자식에 대한 사랑이 너무 크고 무거웠다. 서너 걸음도 못 가서 자식 등에 업힌 게 쑥스러운지 서둘러 내리고말았다. 어느새 먹먹해진 목울대와 시큰거리던 코끝은 시간이 지나서도 좀처럼 가라앉을 줄 몰랐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시린 등에 아득하게 스며들던 엷은 체온이 아직도 느껴지고 있었다. 떠나온 먼 고향의 숨결처럼......

은행나무를 흔히 살아있는 화석이라고 한다. 인류가 나타나기 전부터 나무는 생명을 지켜왔고, 세대를 이어 지금까지 살아가고 있다. 어머니도 그런 화석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 힘겨운 세상을 꿋꿋이 버티며 자식들에게 넉넉하고 자애롭게 베푸는 모습은 이 세상 모든 어머니들과 똑 같을 게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나무, 바로 우리 어머니란 이름의 나무일 게다.

거리에 떨어진 낙엽들은 머지않아 겨울 속으로 사라지겠지. 그리고 봄이 오면 다시 희망이 되어 싹이 트겠지.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은 분명히 부모님께서 걸었던 길이다. 먼훗날, 우리의 아들, 딸들이 뒤에서 걸어올 길이다. 걸어가다가 찬바람이 불어 몸이 움츠러들 때도 있겠지. 하지만, 보일 듯 말 듯 언제나 등 뒤에서 따스하게 감싸주시는 어머니의 마음이 있기에 꿋꿋이 이겨낼 수 있을 게다. 그런 사랑이 우리 자식들에게도 이어지겠지.

온갖 시끄러운 일들로 세상이 혼란스러워진다. 자식보다 안부 전화를 더 많이 하는 어머니다. 전화기를 붙들고 몇 마디 말도 않고 끊지만 차마 다 하지 못한 말들이 여전히 귓전을 뱅뱅 거리며 맴돌아 다니고 있다. 내내 건강하여 비가 오면 비 온다고, 바람 불면 분다고, 눈이 오면 조심하라는 전화 오래도록 받았으면 좋겠다.

노란 은행잎들이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나 보다 먼저 저만치 시간을 앞질러 가고 있다. 나도 한 걸음 두 걸음 가을 속으로 걸어간다. 모두가 그랬던 것 처럼 나도 이 황량한 계절에 마음 따뜻한 은행나무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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