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와 탱자
탱자나무 가시 사이로 피어나는 향기
노란 탱자 두 알이 달콤하고 새큼한 향기를 내뿜는다. 모임에서 만난 동기가 가을 향기를 느껴보라며 건네준 것이다. 산에 갔다가 탐스럽게 익은 빛깔이 하도 고와서 따온 거라고. 그녀의 밝고 상냥한 웃음이 가을 하늘처럼 맑고 싱그럽게 다가온다.
탱자를 코에 대고 깊이 숨을 들이마셔본다. 가슴 깊이 스며드는 내음이 감미롭다.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다가 가슴 밑바닥에서 뭔가가 콕콕 찌르는 것 같아 눈을 뜬다. 아련한 기억 속에서 뾰족하고 날카로운 가시가 하나, 둘 솟아나더니 금세 거대한 탱자나무 울타리가 되어 눈 앞을 가로막는다. 달작지근한 향기의 깊은 곳에서 속을 거북하게 만드는 신내가 스멀스멀 피어난다.
내 어리 적 살던 동네에 탱자나무 울타리를 가진 집이 있었다. 철조망을 머리에 인 벽돌담이 골목을 따라 이어지다가 채마밭을 끼고 돌면서부터 천연 철조망을 가진 탱자나무가 어깨에 잔뜩 힘을 주며 담장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곳을 지나갈때마다 괜스레 가시에 찔리는 기분이 들어 멀찌기 떨어져서 걸었다. 한겨울이면 울타리를 거쳐온 바람이 가시라도 돋힌 듯 더 차갑고 매서웠다.
뒷덜미를 서늘하게 만드는 가시나무에도 계절이 찾아왔다. 봄에는 하얀 꽃이 피고, 여름에는 새파란 잎이 초병의 뾰족한 창끝을 숨겼다. 이파리들 사이로 완두콩 같은 초록색 탱자가 자라나 저녁 노을처럼 노랗게 물들어갔다.
앙상한 가시 속에서 황금색으로 동글동글 매달린 탱자는 보는 이로 하여금 따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했다. 그렇지만, 탱자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가시에 찔리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다.
나와 동갑인 사촌은 노랗게 잘 익은 탱자를 서너 개 따서 가지고 놀았다. 나도 따보려 울타리 앞에 섰다. 커다랗고 무시무시한 가시가 눈을 부라리며 내 몸을 싸늘하게 훑어내렸다. 그 사나운 기세에 눌려 손이 자꾸만 등 뒤로 도망갔다.
지난 해 겨울 아버지가 사오신 제주도 감귤의 달콤한 맛이 입 안에 맴돌았다. 겉모양과 냄새도 비슷하니 어쩌면 저것도 달콤할 거라고 생각하면서. 다시 용기를 내어 가시들 사이로 손을 조심스럽게 뻗었다.
덜덜 떨리는 손을 금세라도 콕 하고 찌를 것만 같았다. 마음이 조마조마하고 숨 쉬는 것 조차 잊을 정도로 긴장이 되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바늘로 찌르는 통증에 놀라 급히 손을 빼버렸다.
어느 놈인지 몰라도 매정하게 내 연약한 팔에 달려든 것이다.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탱자를 가진 사촌이 부러웠다. 노랗게 잘 익은 탱자는 시커멓고 거친 그의 손에서 황금구슬처럼 환히 빛났다.
가지고 놀던 탱자 하나가 땅에 떨어졌다. 흙이 묻은 걸 보고는 아무런 미련도 아쉬움도 없는 듯이 발로 밟아 뭉개어버렸다. 오히려 내가 더 아깝고 안타까웠다. 속이 터진 탱자의 진한 향기가 씁쓸하게 풍겨왔다.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사촌은 일찌감치 돈을 벌러 갔다. 길에서 우연히 만나면 서로 별말없이 그냥 씽긋 한번 웃고 지나쳤다. 희끄므레하고 연약한 내 팔에는 무거운 책가방이 매달려 있고, 단단해 보이는 그의 손에서는 작은 도시락 가방이 달랑달랑 춤을 추고 있었다. 무슨 일을 하는지 몰라도 검게 그을린 팔뚝에 작은 반창고가 하얗게 붙어있었다.
대학생 시절, 책을 사러 시내에 나갔다가 우연히 그를 만났다.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은 나와는 달리, 그는 양복을 입고 있었다. 건장한 체구에 여유있는 웃음까지 지었다. 마치 나보다 몇살이나 더 먹은 어른처럼 보였다.
어디가서 술이라도 한잔 하자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그는 비싼 안주와 술을 스스럼없이 주문하고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예전에 거리에서 만날 때면 으례 그런 미소를 띠었던 게 생각났다.
그는 장농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한다고 했다. 술값 계산을 하려고 꺼낸 지갑 안에는 빳빳한 지폐가 가득 들어있었다. 돈을 세는 그의 손은 나무 껍질처럼 투박하고 거칠었다. 손등에 희미한 상처 자국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몇장의 지폐를 계산대 위에 던지듯이 꺼내놓고 돌아섰다.
서너 해 전에 그의 소식을 들었다. 그는 가구 공장을 차려 그럭저럭 돈도 벌고 결혼도 했다. 몸을 아끼지 않고 밤낮으로 일에 매달렸다. 하지만, 그의 뜻대로 다 이루어지는 건 아니었다. 자세한 사연은 모르겠으나 아내와 이혼하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공장도 문을 닫고 말았다. 게다가 건강까지 나빠져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그에게 남은 건 온통 가시에 찔려 피멍이 든 몸뚱이 뿐이었다. 쓸쓸히 누워있는 모습을 보니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다른 아이들은 갖지 못한 탱자를 그는 잘도 땄고, 그런 그가 속으로는 부러웠었다. 아마도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을 것이다. 그가 향기에 취해 오랜 세월 거두어들인 탱자들이 땅으로 주르르 쏟아져내렸다.
짓밟혀 터져버린 껍질 사이로 속살이 드러났다. 달콤하지도, 향기롭지도 않았다. 그의 기대와 다르게 속이 쉬어버렸는지 시큼한 냄새만이 병실 안을 가득 채웠다.
먹지 못하는데도 날카로운 가시가 왜 그렇게 보물처럼 감싸고 있을까? 멀리까지 풍겨오는 향기는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세상은 가시로 뒤덮힌 숲이다. 돈, 명예, 권력 등등 우리가 원하는 건 가시덤불 속에 숨어있다. 가시에 찔리지 않고는 절대 손에 쥘 수 없는 것이다.
그동안 내가 살아온 세월도 나만의 탱자를 따기 위해서 보냈을 거다. 손 안에 들어있는 탱자가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이 맞는지 알 수는 없으리라. 내일이면 새로운 탱자가 열리고, 다른 탱자를 딸 시간이 아직 내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지금 가지고 있는 탱자는 주운 것도 아니고 얻은 것도 아니라 손수 가시를 헤치고 찔리는 고통을 참으며 땄으니 귀하고 소중하다.
가을이 내게 안겨준 탱자에서 달콤하고도 쓴 인생의 향기가 피어오른다. 흐릿한 기억 너머로 한 아이가 탱자나무 울타리에 매달려 손을 뻗는다. 가녀린 팔에 가시에 긁힌 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