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중요 하나? 내가 중요 하지...
네 개의 모자
나는 원래 모자를 잘 쓰지 않는다. 아니, 잘 쓰지 않았다.
이상하게 모자를 쓰면 뭔가 어색하고 얼굴이 영 못나보이는 거 같아서 중고딩 때도 늘 모자를 가방에 쑤셔넣고 다녔다. 교문을 들어설 때는 매서운 학생주임의 눈초리에 어쩔 수 없이 주섬주섬 모자를 꺼내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튼, 모자와 내 머리통은 영 조화를 이루지 못했기에,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여름에도 모자를 쓰지 않고 다녔다. 그러다보니 여름의 작열하는 썬텐 덕분에 나는 본의 아니게 어디 남국으로 바캉스라도 다녀온 사람 마냥 얼굴이 검게 그을리곤 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머리카락이 하나, 둘 빠지고 가늘어져 머리빗질을 하면 허전함 마저 느껴지고 말았으니... 흐르는 세월에 장사 없다더니...
겨울 찬바람이 불 때면, 나의 힘 없는 머리카락은 제멋대로 휘날려 버리고, 으스스 춥기까지 한다.
결국 아내를 데리고 지하상가에 있는 모자 가게를 찾아가, 그래도 제일 잘 어울린다는 챙이 달린 모자를 하나 샀다.
여름에는 뜨거운 햇빛을 가리기 위해서, 겨울에는 귀마개가 붙어있는 보온용 모자를 쓰고 다닌다. 자꾸 쓰고 다니다보니 그것도 익숙해졌는지 이제는 어색하지는 않다. 오히려 안 쓰면 뭔가 허전한 기분 마저 들기도 한다.
남의 눈에 보이는 겉모습 보다는, 내 건강과 실속을 찾기로 했다. 진즉에 알았지만, 젊었을 때는 그게 왜 안 되었을까?
모자가 패션의 한 부분이기도 하니 아무 거나 다 어울리는 것도 아니라서 아내는 내 머리에다 얼마나 많은 모자를 바꿔 씌웠는지 모른다. 나는 마네킹처럼 가만히 서서 눈만 껌뻑이고 있어야 했다.
모자를 쓰니 한층 더 젊어보인다는 가게 아가씨의 말에 나는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장삿속인지는 모르겠지만... 거짓말이라도 손님을 기분 좋게 만드는 그 아가씨는 아마도 돈을 많이 벌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계절이 바뀔 때 마다 아내는 다른 모자를 사 주었다. 그래서, 나는 네 개의 모자를 가지고 있다. 계절에 어울리는 색깔로...
그래, 뭐든 생각하기 나름이다. 예전에는 안 어울리던 것도 지금은 잘 어울리는 걸 보면, 아마 내 마음이 달라졌기 때문이겠지. 모자는 여전히 그 모양 그대로 거기 있었는데 말이다...
세상에는 때가 있다. 지금이 모자와 내가 비로소 만나는 때가 된 것이다. 우리는 그걸 '인연'이라고도 한다. 어제는 아니었지만, 내일은 궁합이 맞을 수 있으니.
인간관계도 그렇다. 오래 전에 별로 좋지 않게 보았던 사람이 어느 날 다르게 보일 때가 있다. 미처 내가 알지 못했던 면을 보게 되기도 하니... 사람 사이에 너무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언젠가 내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처음에 모자를 사주며 젊어보인다고 말하던 아내가 요즘은 모자 쓴 내 모습이 꼭 할아버지 같다고 말한다. 몇 년 사이에 내가 그렇게 늙어버렸나? 아직은 늙었다는 소리가 내게 어울리지 않을 나이인데 말이야... 혹시나 아내의 보는 눈이 늙어버린 게 아닌가? 하긴, 나이 든 노인들이 모자를 많이 쓰고 다니기는 하는 거 같다.
저녁에 아내가 마트에 장 보러 가자고 한다. 오늘은 휴일이라 아침에 세수만 간단히 하고 머리는 감지 않아 이미 삐죽삐죽 자유분방한 모습인데... 잠시 마트 가려고 머리를 감을 수도 없어서, 나는 서둘러 모자를 꺼내 쓰고 아내의 뒤를 따라 간다. 급할 때는 모자가 해결해 주기도 한다.
나는 웬만하면 모자를 쓰고 나간다. 남들이 나의 차림새를 봐 주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에, 아니, 어쩌면 아무도 모자 쓴 나를 신경쓰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괜스레 혼자 남의 눈을 의식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자기 멋에 살고 자기 편한대로 사는 것도 여러 모로 좋은 일이 아닐는지...